"영하 50도 이하로 떨어져도 공사는 계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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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 1m, 길이 10m짜리 대형 강관을 이어 붙이는 송유관 용접 공사가 한창인 동시베리아 타이세트 현장. [트란스네프티사 제공]

러시아의 동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이 시추공을 뚫는 기계음과 송유관.가스관을 묻는 중장비 소리로 요란하다. 겨울철 영하 50~6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으로 소련 시절에도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이곳에 무진장으로 묻힌 석유와 가스를 개발하기 위한 대역사가 한창이다. 에너지를 무기로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깃든 사업이다.

◆ 타이가(냉대 침엽수림)에 뚫리는 '오일 고속도로'=전체 공사비가 115억 달러에 이르는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 건설 공사는 러시아 송유관 건설과 운영을 독점하는 국영회사 트란스네프티가 맡고 있다. 공사는 2단계로 나뉘어 추진된다. 1단계는 동시베리아 중부도시 타이세트에서 중국 국경 인접 도시 스코보로디노까지의 구간(2700㎞)이고, 2단계는 스코보로디노에서 수출터미널이 들어설 극동 나홋카항 인근 코즈미노 구간이다. 코즈미노 수출 터미널 공사는 1단계 공사와 함께 진행된다.

세르게이 그리고리예프 트란스네프티 부사장은 "4월 말 공사 시작 이래 지금까지 5개월여 만에 300㎞ 이상을 깔았다"며 "2600명의 기술자가 시간대별 계획까지 세워 송유관 건설에 매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온이 영하 50도 이하로 떨어지는 한겨울에도 공사는 계속될 것"이라며 "2008년 말까지 1단계 구간 공사를 마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1단계 구간 공사가 끝나면 우선 중국으로 연 3000만t의 원유가 공급된다. 이를 위해 스코보로디노에서 중국 내륙도시 다칭(大慶)을 잇는 지선 건설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송유관 2단계 공사는 동시베리아.극동 지역 유전 개발 속도를 보아가며 추진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2013~2015년이면 2단계 건설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한다.

송유관으로 원유를 공급하기 위한 유전 개발도 한창이다. 러 국영 석유사 로스네프티, 친 크렘린계 민영 석유사 수르구트네프티가스, 러시아.영국 합작기업 TNK-BP 등이 유전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세르게이 표도로프 수르구트네프티가스 부사장은 "새 유전 개발을 위해 2007년까지 55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할린섬 대륙붕을 개발하기 위한 프로젝트들도 가속도가 붙고 있다. 사할린-1, 2 프로젝트는 벌써 생산단계에 들어갔고, 사할린-3, 4, 5에선 탐사작업이 한창이다. 사할린 개발 주도권도 1990년대 중반처럼 외국 에너지 메이저들이 아니라 로스네프티와 가스프롬 등 러시아 국영회사들이 잡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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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스 수출망도 건설 예정=송유관과 함께 가스관도 건설될 예정이다. 동시베리아와 사할린을 포함한 극동 지역의 대규모 가스전에서 생산될 천연가스를 하나의 파이프라인으로 끌어 모아 극동지역으로 뽑기 위한 '통합가스공급망'(Unified Gas Supply System) 건설 사업이 그것이다. 역시 동북아 국가들과 미국 등으로 팔기 위한 것이다. 알렉산드르 메드베제프 가스프롬 부사장은 "푸틴 대통령의 지시로 올해 말까지 UGSS 프로그램에 대한 정부 승인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르면 내년부터 가스망 건설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것이란 얘기다.

동시베리아와 극동 지역 도시들은 벌써부터 개발에 대한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다. 파벨 조린 이르쿠츠크 주의회 의원은 "동시베리아 송유관 건설은 이르쿠츠크를 포함한 동부 지역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조만간 시베리아에 '폭발'(비약적 성장)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르쿠츠크와 인접한 산업도시 앙가르스크의 안드레이 코즐로프 시장은 "시베리아 개발에 맞춰 이곳에 대규모 석유화학단지와 국제공항.물류기지 등을 건설할 것"이라고 밝혔다.

◆ 푸틴의 동진 이유는=러시아가 에너지 수출시장 다변화를 이루려면 시베리아.극동 지역 개발이 필수적이다. 이고리 세울로프 산업에너지부 대외경제관계부 부장은 "대외 에너지 정책의 목표는 유럽뿐 아니라 동북아에서도 에너지 공급국으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에너지 제국' 건설을 향한 필수사업이다.

서부지역보다 크게 낙후된 동부지역 경제를 살리려는 계산도 들어있다. 국토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이 지역에 러시아 인구의 10%에 불과한 1500만 명이 살고 있다. 변변한 대도시도 없다. 국가에너지안보연구소 콘스탄틴 시모노프 소장은 "동시베리아.극동 개발을 서둘지 않으면 거대한 인구를 가진 중국에 이 지역을 내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정부의 개발 의지를 부추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모스크바.이르쿠츠크.블라디보스토크.

나홋카.코즈미노.사할린=유철종 기자

취재 동행 및 자문=KIEP 이재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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