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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독성 세척제' 제조사엔 파란색 드럼통만…제조사와 업체는 "서로 니탓"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최근 경남에서 19명의 급성 환자가 발생한 업체에 세척제를 납품한 유성케미칼 모습. 위성욱 기자

최근 경남에서 19명의 급성 환자가 발생한 업체에 세척제를 납품한 유성케미칼 모습. 위성욱 기자

23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중공업지구 내 ㈜유성케미칼 정문. 이곳은 최근 19명의 급성중독 환자가 발생한 창원의 두성산업과 김해의 대흥알앤티에 세척제를 납품한 제조사다. ‘유해화학물질 취급 사업장’이라는 안내문이 붙은 출입문을 지나자 공장 앞마당 곳곳에 파란색 드럼통 수십 개가 보였다. 앞마당 중간에는 높이 6~7m 정도의 은색으로 된 유해화학물질 경고문이 붙은 탱크도 몇 개 서 있었다.

이 회사 대표는 “두성산업에 납품한 세척제 ‘유크린T6’ 제품을 보여주겠다”며 공장 내부에 보관된 드럼통 쪽으로 안내했지만 끝내 같은 제품은 발견하지 못했다. 일부 드럼통에는 ‘유크린 505’ 등의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새로운 제품에는 유(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했다.

대표는 “회사별로 원하는 세척액이 달라 원료를 가지고 그때그때 비율을 맞춰 납품하는 경우가 많아 대규모로 재고품이 남아 있지는 않다”며 “이번에 사고가 난 두성산업에 납품한 세척액도 회사 측의 요구에 맞춰 제품을 생산해 납품했다”고 주장했다. 유성케미칼은 중간 유통업자를 통해 제품을 판매하거나 직접 판매를 하기도 한다.

고용노동부 부산지방고용노동청과 창원·양산지청 등에 따르면 두성산업에서 질병 의심자가 확인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0일부터다. 상시 근로자 257명 중 1명이 간 기능 수치 이상 증세를 보여 급성중독 판정을 받으면서다.

이에 노동부는 현장 조사에 나서 세척 공정에 참여한 근로자와 인근에서 작업한 근로자 등 71명을 대상으로 건강진단을 한 결과 16명(기존 1명 포함)이 급성중독 판정을 받았다. 이들은 세척제에 포함된 트리클로로메탄에 기준치보다 6배 이상 노출된 것으로 조사됐다. 트리클로로메탄은 무색의 휘발성 액체로 주로 공기 중에 퍼져 호흡기를 통해 흡수되며, 고농도로 노출되면 간 손상을 일으킨다.

유성케미칼은 이번에 문제가 된 세척제 유크린T6를 지난해 11월부터 두성산업에 공급했다. 근로자들을 위험에 빠뜨린 트리클로로메탄은 유해물질이긴 하지만 다른 원료물질과 섞어 사용할 때 80%의 비율 이하로는 사용 가능하다는 것이 업체의 설명이다. 유성케미칼 측은 “두성 측에서 강한 세척력 등 요구사항이 있어 트리클로로메탄을 60% 정도 비율까지 높여 세척제를 만들어 공급했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유성케미칼 대표가 업체에 납품하는 세척제 중 한 종류를 설명하고 있다 . 위성욱 기자

유성케미칼 대표가 업체에 납품하는 세척제 중 한 종류를 설명하고 있다 . 위성욱 기자

이에 대해 두성산업 관계자는 “트리클로로메탄이 뭔지 우리는 알 수도 없어 그것을 제품에 사용해달라고 한 적은 없다”며 “기존 사용하던 세척제가 냄새가 심해 다른 제품을 찾게 됐고 그래서 유성쪽 제품을 공급받게 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관계자는 “제품을 납품할 때 어떤 유해물질이 포함됐는지 함께 제출해야 하는 MSDS(물질안전보건자료)에 트리클로로메탄을 제대로 표기하지 않은 채 넘겨 여기에 맞춰 작업장 환경을 제대로 조성하지 못했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유성케미칼 대표는 “트리클로로메탄 등 각 원료의 비율은 영업비밀에 속하는 것이어서 정확한 표기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며 “두성 쪽에 몇 차례 시제품을 보내 테스트를 했는데 세척이 잘 안 된다고 해 트리클로로메탄의 비율을 조금씩 더 높이게 됐고, 이런 내용을 구두로는 두성 측에 설명했다”고 재반박했다.

현재까지 노동부는 유성케미칼이 3개월 가까이 제품을 납품하면서 두성산업에 제대로 된 MSDS를 함께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했다. 또 화학물질 제조업체는 제품을 제조하기 전에 성분 자료를 한국산업안전관리공단에 제출하고 심사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이 과정도 생략한 것으로 나타났다.

두성산업은 유해화학물질을 사용하면서 제대로 된 국소배기장치 설치, (근로자) 방독마스크 착용,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화학물질 유해성 고지 등 근로자 보호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노동부는 파악했다. 두성산업 대표이사 등은 이런 혐의로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돼 입건됐다. 중대산업재해 유형은 ▶사망자 1명 이상 발생 ▶동일한 사고로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 2명 이상 발생 ▶동일한 유해요인으로 급성중독 등 직업성 질병자가 1년 이내에 3명 이상 발생 등 크게 세 가지다.

문제는 유성케미칼에서 세척제를 공급한 회사가 영남지역에 70~80곳에 이른다는 점이다. 두성산업에 공급된 ‘T6’ 계열은 18개 업체에 공급된 것으로 나타났다. 비율은 다르지만 트리클로로메탄이 일정 부분 포함된 세척제가 납품된 회사를 의미한다. 나머지 회사는 트리클로로메탄이 포함되지 않은 세척제를 납품했다는 것이 유성 측 주장이다.

 급성 중독으로 인한 직업성 질병자 16명이 발생한 두성산업 모습. 연합뉴스

급성 중독으로 인한 직업성 질병자 16명이 발생한 두성산업 모습. 연합뉴스

최근 급성 중독 환자가 발생한 대흥알앤티 모습. 위성욱 기자

최근 급성 중독 환자가 발생한 대흥알앤티 모습. 위성욱 기자

이런 가운데 노동부 양산고용노동지청은 22일 김해 대흥알앤티 세척 공정 등에서 일했던 근로자 94명에 대해 임시건강진단 명령을 내렸다. 이 업체도 유성케미칼로부터 세척제를 납품받았다. 해당 업체에서는 지난 15일부터 최근까지 세척제를 사용한 전처리 부서 근로자 3명이 독성 간염과 유사한 증상을 보여 2명이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양산지청은 이들 근로자 3명도 두성과 마찬가지로 트리클로로메탄에 중독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원인 물질은 찾고 있다.

유성케미칼 측은 “대흥알앤티에는 트리클로로메탄이 포함되지 않은 세척제를 공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흥알앤티 측의 입장을 듣기 위해 23일 회사를 직접 찾아갔으나 회사 관계자는 “직원들의 사기가 저하된다”는 취지로 인터뷰를 거부했다. 전화로 연락했으나 “담당자가 없다”고 말한 뒤 끊었다.

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최근 ‘세척제 취급공정 급성중독 발생 경보’를 발령하고 ▶유해물질 성분 인지 ▶국소배기장치 설치 ▶개인보호구 착용 등을 당부했다. 이는 올해 공단이 발령한 첫 경보다. 노동부 관계자는 “유성케미칼이 납품한 회사 전체를 전수조사하고 있다”며 “추가로 유사 중독 증상을 보이는 근로자가 있는지 공장 작업환경은 제대로 갖추었는지 등이 점검 대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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