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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는 진짜 다 알고있나”...푸틴 헷갈리게 하는 바이든 심리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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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경제에디터

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 루즈벨트룸. 조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태에 관한 담화 발표 뒤 질문을 받았다.

▶기자=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으로 확신하나.
▶바이든=그렇다.
▶기자=그러면 외교는 이제 논외인가.
▶바이든=그렇지 않다. 그가 행동하기 전까지 외교는 항상 기회가 있다.
▶기자=(푸틴이) 그런 선택을 고려하고 있다고 믿는 이유는 뭔가.
▶바이든=우리는 중대한 정보 능력을 갖추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F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F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는 정보를 미국이 갖고 있다는 바이든 대통령 발언은 실시간으로 생중계됐다. 바이든은 러시아군이 “앞으로 며칠 안”에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전망했다. 또 “무고한 시민 280만 명이 사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목표로 삼을 것”으로 예측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접경 지역 일부를 차지하기 위한 소규모 침공이 아니라 수도를 함락시키는 대규모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새로운 정보를 공개한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 고위 관료들은 이례적으로 기밀 정보를 대방출하는 방식으로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고 있다.

미국, 기밀 공개해 러시아 대응
“며칠 내 공격, 키예프가 목표”
푸틴 의사 결정 재고할 가능성
침공 안 하면 ‘양치기 소년’ 우려

과거 같으면 정보기관과 정부 최고위층 내에서만 공유할만한 기밀을 동맹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고도의 심리전을 통해 러시아의 침공을 막겠다는 의도다.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의 계획을 크게, 반복적으로 외치는 이유는 충돌을 원해서가 아니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제거하고, 그들이 행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이 러시아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 러시아가 다음 행동을 하기 어렵게 만드는 전략이다.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은 공영라디오 NPR 인터뷰에서 “이 전략이 푸틴의 의사결정 계산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으로 예상한 지난 16일 실제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점을 들어 미국의 심리전이 일정 부분 성공했다는 평가도 있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미국 유엔대사는 NPR에 “외교와 (기밀) 노출이 (러시아의) 계획을 지연시켰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USA투데이는 전문가를 인용해 적성국의 군사행동에 대한 미국의 정보 평가를 공개하는 이례적인 전략은 ‘프로파간다 및 조작의 대가’로 알려진 푸틴 대통령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수를 읽고 있다고 판단하면 푸틴 대통령이 계획한 다음 행보에 혼선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존 허브스트는 “러시아의 위협에 대한 공개 논의는 모스크바가 균형을 잃게 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라고 전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군이 19일(현지시간) 벨루스에서 합동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지난 10일 시작한 훈련은 20일 종료된다. [신화=연합뉴스]

러시아와 벨라루스군이 19일(현지시간) 벨루스에서 합동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지난 10일 시작한 훈련은 20일 종료된다. [신화=연합뉴스]

전 세계가 함께 러시아의 도발을 감시하는 효과도 있다. 백악관은 러시아의 예상 행동을 사례별로 예고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으로 위장해 먼저 도발한 것처럼 침공 빌미를 만드는 ‘위장 깃발’ 작전, 통신 두절이나 정부 기관 해킹, 에너지 공급 차단, 소규모 국지전 가능성을 짚었다.

최근 이 같은 사례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데, ‘학습’ 효과 덕분에 우크라이나와 국제사회는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다. 푸틴이 세계를 놀라게 할 일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미국이 기밀 정보 공개를 선택한 것은 미국 국민을 상대로 하는 메시지도 있다. 미국이 더는 해외 전쟁에 참여하기를 원치 않는 대다수 미국인에게 러시아의 적대적 의도를 알리는 것은 유사시 대응하기 위한 여론 형성 역할을 한다.

지난해 아프가니스탄 철군 실패의 악몽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측면도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갈등 전모를 파악하고 철저히 대비하고 있음을 알리는 차원이다.

미국이 공개하는 기밀 정보의 가장 중요한 ‘고객’은 푸틴 대통령이다. 가디언은 전문가를 인용해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제시하는 기밀 정보가 맞는지 틀리는지 알기 때문에 자신이 계획한 행동을 바꿀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앤절라 스텐트 조지타운대 교수는 ”미국과 영국이 얼마큼 알고 있는지, 또 기밀을 공개할지 몰랐기 때문에 러시아가 놀랐을 것“이라며 ”푸틴이 계획을 재고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에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푸틴 대통령이 침공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 미국 정보당국은 '양치기 소년'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미국은 러시아의 침공을 예상하면서 구체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바이든 정부 관료들은 정보원과 정보 수집 방식을 노출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근거 제시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미국이 전쟁을 시작한 사례를 거론하며 경계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국경 대치가 단기전일 때는 미국의 정보전이 유효할 수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망했다. 하지만 푸틴의 목표가 침공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위기감을 조성해 서방 진영과의 유럽 안보 질서 재편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 한다면 미국 전략은 목적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영국의 지정학적 리스크 컨설턴트인 옥사나 안토넨코는 FT 인터뷰에서 ”이런 전략은 단기적 위기일 경우에만 효과가 있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압력을 가하고 서방과 대립관계를 관리하려는 게 푸틴의 장기 전략이라고 가정하면 이는 매우 큰 비용이 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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