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층 주거지 재개발 붐, 빌라 거래 13년 만에 아파트 추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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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6호 14면

볕 드는 서울 빌라

최근 서울 은평구 증산동의 재개발사업지 중 한 곳인 증산5구역의 한 다세대주택은 9억원대에 매물이 나왔다. 불과 3개월 전에는 6억원 하던 대지지분 12평 주택(현 관리처분만 남겨둔 상태)이다. 증산동의 한 부동산중개업소 관계자는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이 지역 빌라(다세대·연립주택을 통칭하는 말) 가격이 많이 뛰었다”며 “최근에도 찾는 사람은 많지만 매물이 없어 거래가 안 된다”고 전했다.

요즘 서울에서는 이른바 ‘빌라’를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그동안 꽉 막혔던 재개발사업의 숨통이 틔인 데다 최근 몇 년간 아파트값이 크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빌라를 찾는 주택 수요가 늘어난 영향이다. 우병탁 신한은행 부동산투자자문센터 팀장은 “그동안 주택 수요는 대부분 아파트에만 쏠렸고 빌라의 경우 재개발 투자자가 전부였다”며 “하지만 최근에는 투자수요에 실수요까지 더해지면서 이례적으로 빌라 거래량이 급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주택 거래 중 절반 이상인 52.8%가 빌라였다. 아파트(38.8%) 거래 비중을 훨씬 웃돈다. 최근 3년간 전체 주택 거래 중 빌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30%, 아파트는 50%였던 것과는 뚜렷한 차이다. 이 같은 분위기는 올해 들어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빌라는 2381건, 아파트는 899건이 거래됐다. 시장에서는 빌라 거래량이 급증한 일차적 원인으로 아파트값 급등과 대출 규제 영향을 꼽는다. 서울 아파트 평균매매가격은 지난해 7월 처음 11억원을 돌파해 지난달엔 11억5000만원을 기록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같은 기간 중위 매매가격(가격순대로 나열시 중간값)도 사상 처음 9억원을 돌파(9억7050만원)했다. 서울 아파트 절반 이상은 매매가격이 10억원에 육박한다는 얘기다. 가격이 급등했지만 대출을 받기는 어렵다. 서울 전역이 투기과열지구여서 집값이 9억원을 초과하면 LTV(담보인정비율)가 20~40%(9억원 이하분은 40%, 초과분은 20%)로 제한된다. 아파트값이 15억원을 넘으면 아예 대출을 받을 수 없다. 아파트값(매매가)에 이어 전세가도 오른데다 대출 문턱까지 높으니 주택 수요자가 틈새상품인 빌라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윤지해 부동산R114 수석연구원은 “대출 규제가 엄격한 상황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가격이 싸고 매물이 다양한 빌라의 매력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2006년 관련 통계 집계 이후 빌라 매매거래량(서울 기준)이 처음으로 아파트를 웃돈 건 2007년 1~6월이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서울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 등지를 중심으로 강도 높은 대출 규제를 시행했다. 이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빌라 거래량이 아파트 거래량을 앞섰던 적을 제외하고는 대개 대출규제 직후 빌라 거래량이 급증했다. 최근의 현상도 정부가 2018년 9·13 대책에서 대출 규제를 강화한 직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부동산학과)는 “아파트값 상승 후 대출 규제가 들어오면 틈새 상품인 빌라로 투자 수요가 옮겨가는 풍선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최근에는 개발 호재가 잇따르면서 투자수요까지 집중적으로 몰리고 있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한양대 교수)은 “정부가 주택 공급 확대를 위해 공공주도·공공참여 재개발을 추진하면서 재개발사업이 본격화하고 있다”며 “특히 재개발사업에 속도를 내기 위해 정부가 다양한 인센티브를 주면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여야 대선후보도 용적률 완화 등 재개발·재건축 규제 완화 공약을 내걸면서 기대감은 한층 높아졌다. 고 원장은 “서울에서는 특히 주택을 늘릴 수 있는 방안이 재개발이나 재건축과 같은 정비사업뿐이어서 (빌라) 투자자 입장에선 이 같은 기조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심리까지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도 재개발사업 확대를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 10일부터 자치구 공모를 시작한 모아타운이 그 예다. 소규모 주택정비구역인 모아타운은 그동안 재개발이 불가능했던 노후·저층 주거지를 대상으로 한다. 서울시는 신축·노후주택이 혼재돼 있어 재개발이 어려웠던 저층 주거지를 정비하기 위해 모아타운을 도입하고, 신속 개발을 지원할 계획이다. 서울시 측은 “모아타운은 다가구·다세대주택 소유자들이 개별 필지를 모아 블록단위로 적정 규모(1500㎡) 이상의 중층 아파트를 개발하는 것”이라며 “공영주차장 등 기반시설을 함께 들이기 때문에 노후 주거지의 주거환경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시는 모아타운을 통해 2026년까지 3만가구를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모아타운 대상지 주민들도 환영하는 분위기다. 재개발 제약 요건이 일반 재개발 사업보다 완화돼 개발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모아타운의 노후도 요건은 준공 20년 이상이 57%로 일반 재개발(준공 30년 이상 67%)보다 낮다. 서울시 저층 주택의 평균 건축연한은 26년이다. 이와 함께 층수 규제도 완화됐다. 노후 저층 주거지 대부분은 2종 일반주거지역인데, 2종 주거지는 그동안 7층 이하로 묶여 있었다. 서울시는 이를 최고 15층으로 규제를 일부 완화했다. 반포1동 지역주민들은 모아타운에 관심을 보이며 오픈 채팅방을 열어 신청 공모를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빌라에 대한 관심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은평구 재개발사업지의 한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재개발·재건축 호재가 있는 곳은 전체적으로 주택시장이 위축된다고 해도 가격이 많이 내리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진형 대한부동산학회장(경인여대 교수)은 “재개발·재건축에 대한 투자수요가 적지 않기 때문에 빌라 매매 거래량이 아파트를 뛰어 넘는 현상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고 원장도 “상당기간 공급 확대로 인해 빌라 매매 급증 현상은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빌라를 매수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투자 목적의 빌라 매입이라면 권리산정 기준일이나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 여부 등을 우선 살펴야 한다. 권리산정 기준일이 지난 경우라면 재개발사업 후 신축 아파트를 받지 못할 수 있다. 우 팀장은 “주택가격이 최근 약간 보합 혹은 하락으로 바뀌는 변곡점에 있어 빌라가격도 이전처럼 상승세가 지속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라며 “빌라 매수세를 따라서 매입하기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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