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실질대화시대 “구축”/평양총리회담이 남긴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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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강 면담 「간접정상회담」/북,현안 종전보다 유화적
평양에서 열린 제2차 고위급회담은 다시 만나자는 것 외에 구체적 합의를 만들어내진 못했지만 남북한이 실질적이고 본격적인 대화의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실감케 했다.
양측은 본질적인 부분에서 여전히 서로의 입장을 움켜쥐고 성큼 내놓지 않았으나 체제인정ㆍ긴장완화 등 핵심현안의 대화농도는 분명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양측은 알려진 대로 오는 12월 서울의 3차회담에 쉽게 합의했고 합의되지 않은 의제에 대해서도 피차 매정하게 끊지 않아 이러한 고위급 접촉이 계속되다보면 남북관계에 의외의 진전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읽게 했다.
평양회담에서 무엇보다 주목된 것은 강영훈 총리의 김일성 주석 면담이었다. 이 면담은 연형묵 북측 총리의 노태우 대통령 면담에 이어 사실상 남북 정상간의 의견교환이자 간접정상회담과 같은 성격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미 연 총리를 통해 남한도 북한의 정치ㆍ사회적 안정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 북한도 남한을 인정하고 개방과 교류에 나서달라는 중요메시지를 전달했으며 강 총리를 통해 이를 재차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아울러 현안의 획기적인 타결을 위해 양국 정상이 직접 만나자는 적극적 제안을 건넸으며 이에 대해 김 주석도 비록 원칙적인 얘기이기는 하지만 동감을 표시하고 총리회담이 잘되면 정상회담도 될 수 있다고 융통성을 보였다.
김 주석이 정상회담의 전단계로 고위급회담을 중요시한 것은 나름대로 대화의지를 표명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김 주석의 원칙론은 거시적 입장에서 평양회담의 성과로 꼽을 수도 있다.
이번 평양회담에서 우리측은 북한에 남한 국가인정ㆍ대남혁명노선 포기를 수락하도록 분명히 촉구하면서 교류ㆍ협력 카드를 적극적으로 밀고 나갔다.
북한은 체제인정같은 원칙문제에 전보다 다소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대남정책의 핵심인 군사문제에 협상력을 집중시켰다.
양측의 이같은 입장은 남한이 제안한 「남북관계 화해와 협력을 위한 합의서 8개항」과 북한이 내놓은 「북남 불가침선언 7개항」에 압축되어 있다.
양측은 서로의 제안이 상대방의 입장을 흡수ㆍ수용한 것이라며 「양보」를 강조하고 있는데 실제로 무력사용금지ㆍ군사당국 직통전화 등 4개항의 내용은 일치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피차 카드 뒤에 숨은 상대방의 의도를 경계하고 각기 자기들의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있다.
북한은 내심 우리측 안중 체제인정(제1항)과 교류ㆍ협력 확대(제2항)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판단인 것 같다.
체제인정은 곧 남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되고 당장의 교류확대는 개방 앞에 취약한 그들의 체제유지전략상 곤란하다는 것이다.
우리측은 북측 안이 ▲체제인정 부분을 「사상ㆍ제도인정」으로 슬쩍 넘어가고 있고 ▲대남 불가침선언을 맺고나면 북측이 2단계로 미국과의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것을 추진하면서 주한미군 철수ㆍ핵무기 철거 등을 들고나올 계산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대립 속에서도 북한은 이번 회담에서 몇가지 조심스런 신축성을 내비쳤다. 북한은 서울회담에서 처음부터 목소리를 높였던 이른바 3대 선결과제에 대해 목소리를 상당히 낮추었을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유연해졌다.
북한은 팀스피리트훈련 절대반대라는 입장에서 『회담진행중 만이라도 중지해달라』는 선으로 물러섰고 유엔문제는 『계속 토의하자』고 했으며 방북인사 석방은 기조연설 말미에 언급했을 뿐이다.
북한의 이러한 변화는 어떻해서든지 분위기를 깨지 않고 회담을 유지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에서 연유된 것이며 이는 3차회담 날짜를 금년 유엔총회가 끝나는 12월 중순(11∼14일)으로 정한 것에 잘 나타나 있다고 관계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물론 내년 1월초 팀스피리트훈련을 구실삼아 북한이 대화테이블을 박차고 뛰쳐나갈 우려를 배제할 수 없지만 북한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그렇게 쉽게 행동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대남 경제교류 등의 필요성을 언제까지 체면 때문에 외면할 수 없고 국제분위기를 보더라도 속도가 문제일 뿐 개방과 변혁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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