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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설이면 2t씩 쌀 기부…23년간 '인심 곳간' 채운 도시 농부

중앙일보

입력

1999년부터 농사지어 2t씩 기부

설 명절을 앞두고 해마다 농사지은 쌀 2000㎏을 이웃에 나눠줬다. 올해로 23년째 나눠준 쌀만 4만5000㎏에 이른다. 대전시내 한복판에 사는 농민 류지현(73)씨 얘기다.

대전시 중구 유천동에 사는 류지현씨가 자신의 집 창고에서 쌀 포대를 들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대전시 중구 유천동에 사는 류지현씨가 자신의 집 창고에서 쌀 포대를 들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대전시 중구 유천동에 사는 류씨는 최근 설 명절을 앞두고 유천동 사무소에 10㎏짜리 쌀 200포대를 기탁했다. 중구는 이 쌀을 유천동 일대 형편이 어려운 이웃 200가구에 나눠주기로 했다. 기부한 쌀은 류씨가 충남 논산시 채운면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했다. 류씨는 "어렵던 어린 시절 제일 귀한 것이 쌀이었다"며 "나이가 들어 농사일하는 게 쉽지 않지만, 손수 수확한 쌀을 동네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일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충남 공주가 고향인 류씨는 1976년 대전으로 이사 왔다. 대전에서 노동 등 품팔이를 해서 번 돈으로 1984년 쌀 가게를 시작했다. 성실한 태도로 고객에게 믿음을 준 덕분에 쌀장사는 비교적 잘됐다고 한다.

대전시 중구 유천동에 사는 류지현씨가 최근 쌀 2000kg을 기증했다. 연합뉴스

대전시 중구 유천동에 사는 류지현씨가 최근 쌀 2000kg을 기증했다. 연합뉴스

그는 이렇게 20여년간 번 돈 9000여만 원으로 2002년 논산시 채운면에 논 1만9800㎡(6000평)을 샀다. 또 대전시 중구 목달동에도 밭 1500㎡정도를 매입했다. 류씨는 “쌀 가게를 하다 보니 채운면 일대에서 생산된 쌀이 품질과 맛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대전에서 좀 먼 곳에 있지만, 이왕이면 고품질 쌀을 생산하고 싶어 그쪽 땅을 사게 됐다”고 말했다.

쌀 장사하다 논 사서 농사지어 

이후 류씨는 쌀장사를 그만두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t트럭에 삽 등 농기구를 싣고 40㎞ 정도 떨어진 논으로 향했다. 류씨는 해마다 80㎏들이 120가마 정도의 쌀을 생산한다. 수확한 쌀을 돈으로 환산하면 2000만 원쯤 된다. 쌀은 2000kg을 기부하고, 나머지는 팔거나 집에서 먹는다. 밭에는 채소나 고구마 등을 재배한다. 재배한 김장용 배추 등도 이웃에 나눠주기도 한다. 그는 농사 말고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박용갑 대전 중구청장(가운데)등 중구 직원과 주민들이 류지현씨 논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다. 사진 대전 중구

박용갑 대전 중구청장(가운데)등 중구 직원과 주민들이 류지현씨 논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다. 사진 대전 중구

류씨는 1999년부터 쌀을 기부했다. 기부하는 양은 해마다 2000㎏으로 똑같고, 시기는 늘 설 명절 직전이다. 그는 “1950~60년대 큰아버지가 농사를 지어 이웃에 나눠주는 모습을 보고 봉사 정신을 배웠다”며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쌀을 나눠주게 됐다”고 말했다.

99세 노모 모시고 사는 효자 

이에 박용갑 청장 등 대전 중구 직원과 주민들은 농번기 때 류씨 논을 찾아 모내기 등을 돕기도 했다. 박용갑 중구청장은 “해마다 빠짐없이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는 류씨는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천사”라고 했다. 류씨는 2016년 황교안 국무총리에게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대전시 중구 유천동에 사는 류지현씨가 자신의 집 창고에 있는 쌀 포대를 들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대전시 중구 유천동에 사는 류지현씨가 자신의 집 창고에 있는 쌀 포대를 들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류씨 집에는 99세 노모와 부인·아들·손자 등 4대가 모여 살고 있다. 그는 “트럭을 몰고 왔다 갔다 하면 기름값 등 비용도 많이 들어 쌀농사를 지어봐야 남는 돈도 많지 않다”며 “3억 원의 빚을 지고는 있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농사를 지어 이웃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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