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가 건강한 사회|박정한<경북대교수·예방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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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달 30일 뉴욕의 유엔본부에 71개국의 정상들이 모였었다.
이라크사대를 논의하기 위한 것도 아니요, 경제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어린이들의 생존과 발육 및 보호를 90년대 경제사회개발의 최우선 과제로 하고 이를 위해 자원을 총동원할 것을 다짐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단 한가지의 공동목표를 위해 세계정상들이 모인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수천년 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질병을 예방할 수도 있고 치료할 수도 있다. 또 전세계인을 충분히 배불리고도 남을 양의 식량을 생산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개도국에서는 하루에 8천여명의 어린이가 홍역·백일해·파상풍 등으로 죽고 있다. 7천명이 설사병으로 죽고 있다. 또 6천명이 폐렴으로 죽고 있다. 이렇게 간단히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있는 질병과 영양결핍으로 5세미만 어린이가 하루에 약4만명이 죽고 있다.
한 어린이가 죽으면 그 주위에는 서너 명의 어린이가 질병과 굶주림으로 제대로 못 자라고 있다. 이렇게 조용한 떼죽음을 종식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겠는가.
선진국은 어떠한가.
선진국에서는 개도국에 비해 어린이 사망률이 훨씬 낮다. 그러나 환경의 파괴, 폭력, 가족의 붕괴, 마약 등과 같은 사회적 질병으로 빈곤계층 어린이들의 삶의 질은 심각한 상태로 떨어지고 있다.
현재와 같은 사망률로 어린이가 죽는다면 90년대의 10년간 개도국에서 1억5천만명이 죽을 것으로 추산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2천5백만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상회의가 계기가 되어 전세계가 노력한다면 5천만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 일을 위한 비용으로 연간 25억 달러(1조8천억원)만 더 쓰면 매년 5백만명의 어린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즉 생명하나에 36만원 꼴이다.
이 액수는 미국의 담배회사들이 쓰고 있은 연간 광고비정도이고, 소련 사람들이 한 달에 마셔 없애는 보트카 값이고, 전세계의 하루 군사비에 불과하다.
개도국에서는 국가예산의 2분의1을 군사비와 외채를 갚는데 쓰고 있어 보건사회예산은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다라서 재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선 순위, 정치적 의지가 문제다.
인구의 폭발적 증가로 지구가 만원이고 식량부족과 환경파괴는 더욱 심각해지는데 어린이를 더 많이 살리자는 것은 일견 모순된 주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지난 반세기 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어린이의 사망률이 떨어지면 그 이상으로 출생률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출생률을 감소시키려면 먼저 어린이의 사망률을 떨어뜨려야 한다.
우리나라의 사정은 어떠한가.
이번 정상회담의 자료집에 한국의 영아사망률(연간 출생아 1천명 당 1세미만 영아 사망 수)이 1988년에 24로 북한과 같다. 5세미만 어린이 사망률도 33으로 북한과 똑같다. 영아사망률은 그 나라 국민의 건강수준, 생활수준, 의료수준 등을 나타내는 지표다.
사실은 우리나라의 영아사망률이 얼마인지 아무도 정확히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출생 후 일찍 사망하는 경우 출생과 사망신고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가 정확한 통계자료를 얻기 위해 투자를 않기 때문이다. 국민소득이 5천 달러로 선진국 대열에 곧 들겠다고 하는 나라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일본의 영아사망률은 5로 세계에서 제일 낮다. 일본의 영아사망률이 이렇게 낮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처음 들어온 1884년에 일본은 이미 조산에 관한 법이 제정되었다.
1930년대에는 모자보건법이 제정되었다. 2차 대전 중에도 일본·영국·미국 등은 특별법을 제정하여 어린이와 임산부에게 영양공급과 의료서비스를 제공했다.
우리나라는 청년에 모자보건법이 제정되었으나 내용은 가족계획에 관한 것이었다.
1986년에 산전관리, 분만관리, 영유아관리 등을 할 수 있게 개정했다. 모자보건법 개정 후 첫해인 87년에 영유아보건사업을 위해 배정된 예산은 불과 1억8천만원 정도뿐이었다.
왜 이렇게 선진국들은 그들의 어린이를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할까.
아마도 우리의 정치지도자와 정책입안자들은 항상 당장 효과가 나타나는 것에, 전시효과가 큰 것에 치중하는 근시안적 안목 때문이 아닐까.
모자보건에 투자하는 것은 20년 이상 긴 세월이 지나야 그 효과가 나타난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건강하지 못하면 그 국가의 장래는 밝지 못하다.
이번 유엔의 정상회의에 우리나라에서도 외무부장관이 참석했다. 이제 우리도 본회의에서 채택한 결의사항을 형식적으로 지지만 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현재 미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 교환교수로 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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