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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을 테러 국가화" 러 법원 '러시아의 양심' 인권단체 폐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러시아의 인권단체 '메모리얼 인터내셔널'의 지지자가 28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대법원 앞에서 항의하고 있다. "우리가 메모리얼이다"는 문구를 들고 있다. [EPA=연합뉴스]

러시아의 인권단체 '메모리얼 인터내셔널'의 지지자가 28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대법원 앞에서 항의하고 있다. "우리가 메모리얼이다"는 문구를 들고 있다. [EPA=연합뉴스]

옛 소련의 철권통치 시절 인권침해를 고발해 온 러시아의 대표적인 인권단체 ‘메모리얼 인터내셔널’(메모리얼)에 대해 러시아 법원이 폐쇄 명령을 내렸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2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러시아 정부가 “소련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다”는 이유로 신청한 해산 명령을 법원이 받아들인 것이어서 후폭풍이 예상된다.

매체에 따르면 이날 러시아 대법원은 인권단체 메모리얼이 온ㆍ오프라인 출판물에서 외국 자본의 영향을 받아 제작됐다는 표기를 제대로 하지 않아 일명 ‘외국 대리인 법’을 위반했다며 청산을 명령했다. 러시아 검찰총장의 지난달 신청에 따른 것이다.

검찰 측은 이날 법정에서 “메모리얼은 과거보다 너무 부정적으로 변했다”며 “이는 외국 기부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단체가 러시아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기억하는 대신 소련을 테러 국가라는 잘못된 이미지로 만들고 있다”는 주장도 했다.

FT는 이 같은 러시아 당국의 메모리얼 해체 시도가 소련의 역사를 미화하기 위한 것으로 대중의 비판을 받았다고 전했다. 또 메모리얼 폐쇄로 크렘린 궁이 야당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투옥과 독립 활동가ㆍ언론인에 대한 “전례 없는 탄압의 한 해”를 마무리했다고도 꼬집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대법원 앞에 28일(현지시간) 메모리얼 인터내셔널의 지지자들과 기자들이 모여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 모스크바의 대법원 앞에 28일(현지시간) 메모리얼 인터내셔널의 지지자들과 기자들이 모여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날 법정 밖에서 대기하던 메모리얼 지지자들은 법원의 결정 이후 “부끄러운 줄 알라!(shame!)부끄러운 줄 알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번 사건에 적용된 ‘외국 대리인 법’은 러시아 정부가 외세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국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2012년 도입했다. 해외 기금 지원을 받는 비영리 기구(NGO)나 활동가, 언론이 “정치적 활동”을 하려면 출판물 및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SNS) 게시물까지 출처를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러시아 법무부는 2016년 해당 법을 근거로 메모리얼을 외국계 대리인으로 지정했다.

메모리얼의 올레크 오를로프 의장은 “법원이 순전히 이념적으로 불법적인 결정을 했다”며 “소련의 역사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고 밝혔다. 메모리얼 측은 이번 결정에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1987년 출범한 메모리얼은 1930년대 스탈린 시대 소련의 강제 수용소 운영, 처형 등 잔혹 행위를 폭로해왔다. 수백만 희생자의 피해 사실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맡아 “러시아의 양심”으로 불렸다. 메모리얼의 창립자인 안드레이 사하로프(1921~1989년)는 소련의 핵물리학자 출신의 반체제 인사로, 197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러시아 대법원의 판사가 28일(현지시간) 메모리얼 인터내셔널 청산 신청에 대한 결정을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 대법원의 판사가 28일(현지시간) 메모리얼 인터내셔널 청산 신청에 대한 결정을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국제사회도 비판에 가세했다. 미국 국무부의 네드 프라이스 대변인은 28일 언론 브리핑 모두에서 “러시아 대법원의 메모리얼 강제 폐쇄 결정을 규탄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프라이스 대변인은 “러시아 당국은 자국 내 독립적인 목소리와 인권 운동가에 대한 탄압을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라고도 했다.

국제앰네스티도 “이번 결정은 러시아 정권의 피해자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라며 “당국이 메모리얼 폐쇄로 소련의 수용소에서 사라진 수백만 희생자들의 기억을 짓밟고 있다”는 규탄 성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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