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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으로 본 세상](15) "가족이 리스크라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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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리스크란다. 세상에 그런 말도 있던가. 집, 그리고 가족은 사회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위로받는 곳이다. 내일을 위한 휴식 공간이다. 그곳이 리스크라니…. 점점 '막장'으로 변해가는 선거판에 많은 이들이 혀를 찬다.

여당 후보는 '형수 쌍욕'으로 비난받더니 이젠 아들 도박으로 수세에 몰렸다. 유력 야당 후보는 아내 경력 위조에 장모 요양 병원 사기까지….' 어느 가족의 죄질이 더 나쁘냐'를 놓고 양 진영은 옥신각신, 치고받는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배워 수양하고, 가정을 편안하게 이끌고, 그런 후 나라를 다스리고, 더 나가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

두 후보가 수신(修身)을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겠으되, 모두 '제가(齊家)'에서 발목이 잡혔다. '집안도 제대로 간수 못 하는 사람들이 뭔 대통령을 하겠다고….'라는 탄식이 나온다.

주역 37괘인 '풍화가인'은 가족이 주제다. 현대 가정 윤리에도 많은 걸 시사한다.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운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의 한 장면.

주역 37괘인 '풍화가인'은 가족이 주제다. 현대 가정 윤리에도 많은 걸 시사한다.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운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의 한 장면.

이건 또 뭔가.

부부가 택시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단다. 서로 다퉜다. 택시 운전사가 진정시키려 졸음 쉼터에 차를 세웠다. 부부는 내리더니 계속 싸웠다. 다시 택시에 오른 남편이 "갑시다, 출발하세요" 했단다. 부인은 뒤로 남긴 채 말이다. 이튿날 부인은 도로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엄마와 딸 사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고속도로 자동차 안에서 모녀가 다퉜고, 엄마가 급히 차에서 내리는 바람에 뒤에서 오던 차에 치여 숨졌단다. 드라마에나 나올 비극이다. 그런 참극이 지금 대한민국 고속도로에서 벌어지고 있다. TV 뉴스 속 가족 이야기는 우리 가정이 지금 엉키고 꼬여가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가정은 왜 흔들리는가? 집안 다스리기가 본디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주역 37괘 '풍화가인(風火家人)'은 바로 그 가정이 주제다. 가족 구성원의 윤리적 담론을 담고 있다. 바람을 뜻하는 손(巽, ☴)이 위에 있고 불을 상징하는 리(離, ☲)가 아래에 있다(䷤). 불이 타올라 바람을 일으키는 형상이다. 흔히 '가정의 괘'로 통한다.

주역 '풍화가인' 괘는 불이 타올라 바람을 일으키는 형상이다.

주역 '풍화가인' 괘는 불이 타올라 바람을 일으키는 형상이다.

가정의 최소 구성은 아내와 남편이다. 주역은 부부의 본분(本分)을 이렇게 말한다.

'女正位乎內, 男正位乎外'

'아내는 안에서 바르게 지키고, 남편은 밖에서 바른 위치를 지킨다.'

남편은 밖에 나가 밭을 갈거나 사냥을 하고, 아내는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돼지를 먹인다. '주역의 시대' 가정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부부 맞벌이 시대다. 똑같이 돈 버는데 왜 밥은 아내만 해야 하고, 아이는 왜 엄마만 키워야 하느냐? 부부도 평등해야 한다. 그러니 주역이 고리타분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런 얘기 나올 수 있다. 그렇지 않다. 주역은 지금 아내와 남편의 본분, 즉 책임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남편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식구들 먹여 살리는 것이다. 사냥해서 멧돼지를 잡아 오든, 회사에 나가서 월급을 받아오든 그게 남편의 가장 중요한 책무다. 그걸 방기하는 자는 남편 자격 없다.

남편이 잡아 온멧돼지로 요리하고, 벌어다 주는 월급으로 가정 경제를 꾸리는 건 아내의 역할이다. 남편 벌이가 얼마나 되느냐는 건 문제가 아니다. 아내는 남편 월급 범위 내에서 반찬꺼리도 사고, 아이 학원도 보내고, 저축도 한다. 월급 100만 원 받는다고 불행하고, 1000만 원 받는다고 반드시 화목한 건 아니다.

그러기에 주역은 아내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정 화목의 키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가인(家人)'괘 괘사(卦辭)가 '아내가 바른 도리를 지켜야 이롭다(利女貞)'라고 시작하는 이유다.

공자(孔子)는 가정 윤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父父子子, 兄兄弟弟, 夫夫婦婦'

아버지와 자식, 형과 동생, 남편과 아내가 모두 본분(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 책임을 다할 때) 가정이 바로 서고, 가정이 바로 서야 천하가 편해진다(正家而天下定矣)'는 게 공자의 해석이다. 이 말이 '대학(大學)'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로 발전했다.

공자는 '가인' 괘 설명에서 부부의 본분을 특히 강조했다.

'男女正, 天地之大義也'

'남편과 아내가 본분을 지키는 것은 곧 천지 대의를 이뤄내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응해 만물을 키워내듯, 남편과 아내가 서로 의지하고 채워 가정을 이뤄가야 한다는 말이다.

남편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집 단속 잘하고, 외부 공격으로부터 가정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첫 효사(爻辭)는 이렇다.

'閑有家, 悔亡'

'문단속을 잘하면 후회가 없다'

한자 '閑(한)'은 '대문과 대문을 잇는 장대 나무'를 뜻하는 단어다. 제주도에서 밖에 나갈 때 집 대문에 걸어두는 정낭을 생각하면 된다. 장대 나무를 건다는 건 집 내부와 외부를 단절한다는 뜻이다. 경계다.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내 집 바운더리 안은 화목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지키겠다는 결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남편이다. 예나 지금이나 집 단속 잘해야 후회가 없다.

주역은 두 번째효사에서 아내의 역할도 언급했다.

'无攸遂 在中饋'

'밖으로 나돌지 마라. 음식 준비해야 한다.'

글자 '遂(수)'는 무엇인가를 욕심내 맹목적으로 쫓아가는 걸 뜻한다. '아내가 집안일을 망각하고 밖으로 나돌아서는 안 된다' 정도로 해석된다. 물론 '주역의 시대'의 얘기다. 맞벌이 시대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아내가 무엇인가에 홀려 밖으로 나도는 집이 화목할 리 없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집안 일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하는 게 아내의 현실이다. 직장 여성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주역은 엄격한 가정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근본은 '사랑'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주역은 엄격한 가정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근본은 '사랑'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가정은 자녀 교육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주역은 가정 교육의 엄격함을 강조한다. 집에는 반드시 엄한 가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家人有嚴君焉). 엄한 아버지를 뜻하는 '엄부(嚴父)', '엄친(嚴親)'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가인' 괘 세 번째 효사는 '집안 가장이 엄하게 자리를 잡고 있으면 결국 잃는 게 없을 것(家人嗃嗃 未失也)'이라고 했다. '아내와 아들이 시시덕거리며 함부로 웃는다면 집의 절도가 사라진다(婦子嬉嬉 失家節也)'는 말이 이어진다. 가장이 중심을 잡고 있어야 집이 바로 선다는 얘기다.

물론 근본은 사랑이다.

6개 효(爻) 중에서 '으뜸 효'로 꼽히는 제5효는 '군주는 가사에 임함에 사랑으로 서로를 잇는다(王假有家 交相愛也)'고 했다. 툭하면 혼내고, 소리치고, 때리고…. 이런 짓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오로지 사랑으로 엄격함을 유지하는 것, 그게 군자의 가정 교육이다.

가장 큰 교육은 부모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자라기 때문이다. 주역은 '자녀에게 믿음을 줘야 하고(有孚), 위엄이 있어야 한다(威如)'고 했다. 어떻게 하면 자식들에게 믿음을 주고, 위엄을 갖출 수 있을 것인가. 주역의 답은 명쾌하다.

'君子以言有物而行有恒'

'군자는 모름지기 말에 팩트(실체)가 있어야 하고, 행동은 일관되어야 한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거나, 어제 한 말을 오늘 또 바꾸거나, 이곳에서 한 말과 저곳에서 한 말이 다른, 그런 소인배가 되어서는 가정을 건강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경고다.

엉키고 꼬이는 가정, 부모가 본분을 지켜야 한다. 항상 자신을 반성하고, 스스로 참 되는 것밖엔 다른 도리는 없다. 그게 주역이 가르침이다.

예나 지금이나 참 부모가 되는 길은 쉽지 않다.

한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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