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으로 본 세상](14)위기의 순간, '액액' 웃을 수 있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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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처절한 목소리들,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직접 보니 마음이 무겁네요."

공항을 빠져나오던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최근 미국에 다녀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얘기다. 현장의 처절한 목소리, 시장의 냉혹한 현실…. 또 다시 위기가 몰려오고 있다는 경고였다.

이재용의 삼성은 다시 신발 끈을 동여매고 있다. 부문 간 벽을 허물고, 세대교체를 단행하고, 청년 인재를 과감히 발탁한다. '뉴 삼성'의 기치를 높게 들어 올렸다. 폭풍우를 대비한 포석이다.

삼성이 '뉴삼성'의 기치를 들고 또다시 혁신을 꾀하고 있다.

삼성이 '뉴삼성'의 기치를 들고 또다시 혁신을 꾀하고 있다.

위기와 삼성….

필자가 베이징 특파원으로 간 건 1999년 9월이었다. '베이징에도 실리콘밸리가 있어...' 중국인 친구의 이 한마디에 취재 수첩을 챙겨 달려갔다. 그랬다. 실리콘밸리의 IT 붐은 중관춘에도 밀려오고 있었다.

당시 중관춘에서 봤던 장면 하나.

한 젊은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손수레를 끌고 있었다. 수레에 가득 실린 박스, 'SAMSUNG' 모니터였다. 당시 한국 브랜드(삼성, LG) 모니터는 최고 인기 품목이었다. 중국시장의 약 70%를 먹고 있었다. 돈 엄청 벌었다.

오래가지 않았다. 중국 기업은 기술 추격에 나섰다. 2003년쯤, 역전됐다. 우리나라 모니터 브랜드는 현지 중국 기업에 밀리기 시작했다. 위기의 폭풍우는 그렇게 밀려왔다.

여기서 끝인가…. 아니다. 삼성은 패러다임을 바꿨다. LCD로 갈아탄 것이다. 중국 텐진(天津)의 브라운관 공장을 접고 쑤저우(蘇州)에 LCD 디스플레이 생산 라인을 새로 깔았다. LCD로 중국 디스플레이 시장을 또 먹었다. 돈 엄청나게 벌었다. 삼성에 위기는 기회였다.

중국 기업이 앉아 당할 리 없다. 또다시 추격전을 벌였다. 10년 정도 죽어라 따라왔고 2015년 즈음에는 거의 잡혔다. 삼성 디스플레이 사업에 또다시 위기의 폭풍우가 밀려왔다.

그게 끝인가 했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삼성은 OLED로 갈아탔다. 싸움의 패러다임을 다시 한번 바꾼 것이다. 그렇게 또 중국 디스플레이 시장을 먹었다. 중국 기업이 OLED 분야에서도 많이 따라왔다고 하지만, 삼성은 여전히 독주다. 세계 스마트폰용 OLED 디스플레이 시장의 70%를 먹고 있다. 중국에서도 독보적이다.

다 밀렸다. 백색가전이 중국에 잡혔고 기계, 철강 등이 밀렸다. 조선, 화학, 심지어 자동차마저위협당하고 있다. 그나마 우리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분야가 반도체, 그리고 디스플레이다. 삼성이 버티고 있는 바로 그 영역이다.

삼성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위기의식이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결기가 오늘 삼성을 만들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폭풍우를 감지하고 대비하는 힘, 그게 삼성 경쟁력의 근원이다.

주역 51괘 '진위뢰(震爲雷)'괘를 보며 특파원 시절 현장에서 본 '삼성 디스플레이 스토리'를 떠올린 이유다.

주역 '진위뢰'는 '위기의 괘'로 통한다. /바이두

주역 '진위뢰'는 '위기의 괘'로 통한다. /바이두

'진위뢰' 괘는 우뢰를 상징하는 뢰(雷, ☳)가 위아래로 겹쳐져 있다(䷲). 하늘에서는 번개와 천둥이 쿵쾅거리고, 땅에서는 지진이 산천을 쩍쩍 갈라놓는 형상이다. 무섭다. 공포다. 위기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진위뢰는 '위기의 괘'다.

그런데 주역은 이 공포를 단순한 위기로 보지 않는다. 괘사(卦辭)는 오히려 '형통(亨)의 시작'이라고 했다.

'震來虩虩, 笑言啞啞'

글자 '虩(혁)'은 '호랑이가 깜짝 놀라는 펄쩍 뛰어오르는 모습'을 뜻하는 의태어다. '啞(액)'은 큰 소리로 웃는 걸 표현하는 의성어다. 의태어와 의성어가 겹쳐진멋들어진 괘사다. 전체를 풀면 이런 뜻이다.

'우뢰 소리에 호랑이도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랐지만, 군자는 오히려 허허~ 웃음을 짓는다.'

공포의 순간에도 느긋하게 웃을 수 있다. 어떻게? 공자(孔子)의 해석은 이렇다.

'洊雷震, 君子以恐懼修省'

'우뢰가 겹쳐 다가온다. 군자는 이 공포의 시간에도 오히려 수양하고 반성한다.'

제대로 된 리더는 위기가 닥치면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는다. 위기 조짐을 미리 감지하고, 대비한다. 그러니 초연할 수 있다. 주역은 이를 두고 '백 리에서우뢰 소리가 진동하더라도 태연하게 제사를 지낼 수 있다(震警百里, 不喪匕鬯)'라는 말로 표현했다. 마지막 효사(爻辭)는 이렇게 말한다.

'쫄지마라, 흉하다. 내 이웃에 닥친 위기일지라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震索索, 征凶, 畏隣戒也'

위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태풍 피해 복구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다시 올 태풍에도 끄덕 않는 안전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뢰가 지난 후 법제를 정비한다(後有則也)'는 주역 글귀는 이를 두고 나온 말이다.

미리 대비하고, 후속 조치에 만전을 기할 때 공포는 오히려 복으로 연결된다(恐致福也). 3000년 전 '주역의 시대'에도 '위기(危機)는 곧 기회(機會)'였던 셈이다.

주역 '진위뢰' 괘를 관통하는 철학은 편안할수록 위험을 생각하라는 뜻의 '거안사위(居安思危)'이다. /guoyi360.com

주역 '진위뢰' 괘를 관통하는 철학은 편안할수록 위험을 생각하라는 뜻의 '거안사위(居安思危)'이다. /guoyi360.com

'진위뢰' 괘를 관통하는 단어 하나를 꼽자면 '거안사위(居安思危)'이다. '편안할수록 위험을 생각하라'는 뜻. 춘추시대의 역사책인 '춘추'의 '좌씨전(左氏傳)'에 나오는 말이다. 풀 워딩은 이렇다.

’居安思危, 思则有備, 有備无患'

'편안할 때일수록 위기를 생각해라. 생각해야 대비를 하고, 대비가 있어야 근심이 없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유비무환(有備無患)'이 여기서 비롯됐다.

이재용 부회장은 현장의 처절한 목소리들,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직접 봤다고 했다. 미·중 갈등으로 인한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의 붕괴, 중국 기술의 도전, 시장 판도를 뒤흔들 합종연횡…. 자칫 머뭇거렸다가는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진다. 그는 글로벌 경쟁의 현실을 말하고 있다.

조금 잘 나간다고 안주하지 말아라! 이재용의 공항 일성(一聲)은 삼성에 대한 경고이자, 우리 사회에 던지는 경종이기도 하다.

거대한 우뢰가 몰려올 때 군자는 반성하고 게으름을 털어낸다고 했다. 기업 CEO는 조직을 재정비하고, 국가 지도자는 국민총화를 끌어낼 방책을 짜야 한다. 그게 제대로 된 리더가 지금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진짜 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는 '액액(啞啞)'하며 웃을 수 있을 것 아닌가.

이재용 부회장이 울린 경종에 대한민국은 귀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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