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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변해도 부도는 지켜야죠"-대구향교 명륜교육원장 허봉출 여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사조가 달라져도 결코 잃어선 안될 한국고유의 여성상과 부도는 지켜야한다며 여성후진양성에 몸바쳐온지 60평생.
손자손녀들의 재롱을 받으며 안방마님 아닌 현대식 할머니로, 집안의 어른으로만 안주하기엔 오늘의 세태가 너무나 불안하다는 허봉출 여사(65·대구시 침산동430).

<고유의 여성상 강조>
「운지시가락 무탐칙우」(넉넉함을 알면 가위 즐거울 것이요, 욕심이 많으면 이것이 곧 근심이 된다).
굳이 어려운 경전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허 여사 자신이 바로 마음을 비워서 마음이 넉넉한 장본인이다.
그는 우리고유의 정신문화가 병들어가던 70년대부터 「수신제가」를 외쳐온 원로 유림이다.
공식직함은 성균관 여성유도회 예학연구원장과 대구향교 명륜교육원장.
거센 현대화바람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물질문명에 휩쓸려온 우리나라 여성들의 부덕을 지키기 위해 백행의 근원이자 윤리도덕의 근본인 유교경전을 보급시켜온 지 올해로 20년.
『가정마다 주부들이 앞장서 지성봉친하고 화목하며 나라를 사랑할 줄 아는 가풍을 세운다면 그게 바로 치국평천하가 아니겠습니까.』
허 여사는 무너져버린 고유의 질서와 과소비·사치·퇴폐풍조에 오염돼 부덕을 상실해버린 오늘날의 세태를 개탄하면서 충효사상에 바탕을 둔 고유의 동양적 정신문화 재정립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부모심정서 출발>
개화된 집안에서 태어난 여사는 일제때인 1942년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 국교교사로 재직하다가 부군 구자업씨(73·대구향교 재단이사장)를 만나 평범한 주부의 자리를 지켜오다 슬하의 3남l녀가 장성한 뒤 본격적으로 대구향교 교화사업에 참여했었다.
『젊은 부부들의 이혼율이 급증하고 고유의 대가족제도를 고집하는 시어머니와 핵가족을 추구하는 며느리와의 갈등도 사회현상으로 두드러져 자식 가진 부모의 심정에서 카운슬러가 되어주기로 결심했지요.』
그러나 허 여사는 무엇보다 시대변천에 따라 급격히 무너져가는 고유의 미풍양속을 지키고 윤리도덕관을 정립하는 정신자세의 혁신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이같은 취지에서 허 여사가 75년3월 대구시 남산동735 대구향교 명륜당에서 평소 뜻을 같이해온 주부들과 모임을 갖고 설립한 것이 여성유도회 경북 본부.
유림의 본고장에서 규방을 지키는 것만이 미덕으로 알았던 고만고만한 주부들이 유림운동에 뛰어든 것은 우리모두의 가정을 화목하게 이끄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초대회장을 맡은 여사가 첫 사업으로 시도한 것은 여가선용을 위한 여성교양강좌. 대구향교에 여성유도회 교화부를 설치, 토·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11시, 오후7시 등 두 차례 명륜당에서 20세 안팎의 규수로부터 70세 고령의 할머니까지 각계각층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교양프로그램을 마련해 교양강좌를 실시했다.

<규중문고도 보급>
그뿐 아니라 생활예절과 한국고전의상·고전예술·건강위생관리 등 다양한 강좌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고부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좌담회와 올바른 자녀교육의 상담시간도 마련하는 등 전통적인 한국여성이 갖추어야 할 도의 규범을 개발해왔다.
그 결과 여성유도회 발족당시 30여명에 불과하던 회원이 지금은 대구지역내 2천8백여명, 경북지역은 l천6백여명에 이르고있으며 여성교양강좌를 수강한 사람만도 수만명을 헤아릴 정도.
뿐만 아니라 여성유도회는 여모정렬로 대표되는 「절명사」등 규방가사와 규중행실가·경산효행실록 등 고전문고도 발간, 유도회원들을 중심으로 가풍확립을 위한 규중문고로 보급하고있다.
『평소 부녀자로서 갖춰야 할 언행과 솜씨 등 이상과 가풍을 세우기 위한 전통적인 부도에 보수의 멍에를 씌우려는게 아닙니다.
정당한 비판을 통해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건전한 외래사상도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지요』라고 말하는 허 여사는 『우리풍습과 규범을 전제로 한 서구문화릍 융합시켜 한국의 여성상을 심는 것』이 전통정신의 현대적 승화라고 강조한다.

<대구시민상 받아>
그래서 허 여사는 시대변천에 적응할 수 있는 여성을 길러내기 위해 패션과 미용·외국어·시사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특히 석존제 등 현성들을 배향하는 향사에도 남성들만 배향하던 전통과 인습을 깨고 여성유림들이 참석할 수 있는 길을 여는 쾌거를 이룩해냈다.
지난해엔 그동안 여성교양교육에 기여한 공로와 소년가장·영세모자세대의 결연사업을 추진해온 공로로 「자랑스런 대구시민상」을 받기도 했다.
『사실 남을 가르칠 입장도 못되면서 치맛바람이나 날리는 저 자신이 부끄러울 때도 있지만 이 조그만 정성이 우리모두의 가정을 지키는데 한몫을 한다는 생각에서 보람을 느낍니다.』
자신이 지은 권선가를 읊조리며 명륜당을 나서는 여사의 남빛 치맛자락에서 이 나라 현모양처의 모습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글 이용우·사진 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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