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사법개혁, 물타기式 경계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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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민주주의는 법치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민주적 개혁은 무엇보다 사법시스템의 개혁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1990년대 두 번에 걸친 사법개혁 논의는 사법의 민주화.세계화, 대국민 서비스 강화 등 그 과제와 방향에 대한 전 사회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변화에 눈감은 사법 관료들의 기득권 옹호 전략에 밀려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이번에 새롭게 출범한 사법개혁위원회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된 실패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이번 위원회는 소위 제4차 사법파동으로 궁지에 몰린 대법원의 궁여지책과 청와대의 현실주의적 선택이 결합해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같은 미묘한 결합 때문에 지난날의 논의에서 나타난 한계들이 재발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선 위원회 구성에서부터 드러난다. 법조인과 비법조인을 동수로 구성했다는 대법원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에서는 사법기득권이 그대로 관철되고 있는 구조라 할 수 있다. 법률전문가인 법조인의 경우 법원.검찰.변협 등 거대한 기관의 대표자로서 참여하고 있는 반면 민간위원의 경우 전문성 부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개인적 수준에서 조직적 도움조차 없이 홀몸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과거의 경험에서 보듯 의제 설정과 논의의 진행을 누가 주도하게 될 것인지는 명백하다. 거의 변혁의 수준으로 이뤄진 일본의 경우 사법개혁은 법조인의 참여를 극소화하는 대신 민간위원들의 혁신적.창의적 발상에 의해 주도됐다. 이를 감안하면 법률전문가 내부의 안배에만 집착해 개혁돼야 할 법조인들을 전면에 배치한 이번 위원회의 구성은 그 결과를 회의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다.

위원회의 결정을 집행할 수 있는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과거의 사법개혁 논의에서 그나마 마련한 몇몇 개혁방안조차 유야무야됐던 것도 그 후속조치를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법률서비스 확대나 인권보장 방안 등도 슬로건만 난무했을 뿐 아무도 그것을 입법화하고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 지금의 위원회 역시 개혁안을 마련해 대법원장에게 건의하고 대법원장은 이를 대통령에게 제출하는 것으로 그칠 뿐 그 개혁안을 입법하거나 필요한 물적.인적 자원을 확보할 의무를 어느 누구에게도 부여하지 않고 있다.

이번 위원회에서 사법개혁을 향한 국민적 열정을 효과적으로 반영할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돼야 한다. 회의의 경과와 내용은 '원칙적'으로 공개한다지만 정작 중요한 회의 자체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또 사법개혁과 관련한 시민단체의 의견을 반영할지 또한 위원회의 결정에 일임하고 있다. 물론 여론조사나 공청회 기회를 마련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대부분 검증 수준에 그치기 십상이다. 한마디로 위원회는 시민사회와의 유기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전 국민의 사법개혁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법조 관료가 중심이 돼 어젠다를 독점하는 구조로 돼 있는 것이다.

이번의 사법개혁 논의는 법원.검찰의 숙원과제를 물타기식으로 풀어나가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논의는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주도하고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한 인프라로서 사법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돼야 한다. 하지만 갓 출범한 위원회가 닫힌 구조를 가졌다는 점에서 이러한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위원회의 조직과 구체적 운영방식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인 만큼 이러한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이 같은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보다 현재의 논의구도를 주도하고 있는 사법부를 비롯한 법조집단이 지금껏 안주해 왔던 그 기득권을 국민에게 양보해야 한다. 제로 베이스에서 새로 사법제도를 설계한다는 자세로 국민의 목소리에 충실히 귀기울일 때 우리 시대 민주개혁의 큰 결실로서 사법개혁이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한상희 건국대 법대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