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제국' 미국은 어디로] 슬라보이 지젝 철학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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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마침 한국에 온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 슬라보이 지젝을 서울대 호암생활관에서 만났다. 유럽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인 그는 미국과 유럽의 많은 대학에서 철학과 예술론을 강의한다.

-미국은 제국인가.

"좌파인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놀라겠지만 미국은 아직도 국민국가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다. 한편으로는 정의를 위한답시고 밀로셰비치 등 발칸의 전범들을 헤이그 전범재판소에 넘기라고 압력을 넣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들을 전범재판소에 넘기지 말라는 합의서를 내민다. 코소보 사태 때 미국이 개입했기 때문에 학살이 끝났다. 미국은 제국에 요구되는 대가를 치를 의사가 없어 보인다."

-로마와 미국의 차이는.

"로마가 더 개방적이고 관대했다. 로마는 영토 내 대부분의 사람에게 시민권을 주고 법도 평등하게 적용했다. 미국은 그게 부족하다. 또 한가지 로마는 안팎의 구분이 분명했다. 로마 밖은 게르만이라는 야만인의 세상이었다. 미국은 자기 세력권 안에서 벽을 쌓는다. 올드 유럽과의 갈등을 보라."

-그야 미국에는 현실적이든 잠재적이든 도전 세력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긴 하다. 그러나 잠재적인 도전 국가로 첫손 꼽히는 중국은 지금 사실상 미국의 노동자 계급 구실을 한다. 장난감을 포함해 거의 모든 게 중국에서 만들어진다. 중국 상대의 아웃소싱이 유행이다. 미국 경제의 대외 의존도가 너무 높다. 멕시코 사람들이 미국의 은행에 예금하거나 투자한 돈이 1천억달러나 된다. 러시아 사람도 많은 돈을 미국에 보내 놓고 있다."

-미국의 신보수파는 유럽이 미국 덕에 안보 걱정을 안 하고 편안하게 산다고 야유한다.

"미국이 유럽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 미국은 성실성을 갖고 유럽을 파트너로 대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굴욕감을 준다. 유럽이 과거에 피운 말썽을 생각하면 국제기구에 의존하는 칸트적인 평화가 나쁠 게 없다. 그리고 미국도 내심으로는 유럽이 군사적으로 적극성을 띠는 걸 원치 않는다."

-중국이 정말 미국의 잠재적인 적대국인가.

"앞으로 미국과 중국 간에 긴장이 예상된다. 부시가 푸틴에게 우호적인 것도 중국과 러시아의 밀착을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럽이 제3의 세력으로 등장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라크 전쟁은 성공적인가.

"전쟁에 이기고 평화에 졌다. 네오콘이 이라크를 침공한 이유는 대량살상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후세인 정권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고, 과격파가 정권을 잡을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해 예방 차원에서 이라크를 침공한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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