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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화 교수의 디지털 세상 ⑦ 가상 공간의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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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거행된 엘카이저군과 엘 양의 결혼식 장면.

# 사랑과 명예의 사생결단

아름다운 베크누 항구에 사레흐라는 아가씨가 살았다. 사레흐에겐 베흐론이라는 애인이 있었다. 그런데 베흐론이 가족 농장을 상속받는 대신 채석공이 되겠다고 하자 사레흐의 아버지 달즈 씨는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몰래 밀회를 하다가 아버지에게 들킨 사레흐는 애인과 함께 도망쳐 도흐조크 절벽에 숨었다. 그러나 가족을 잊지 못해 먹지도 말하지도 않고 절벽에 서서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말라죽을까 걱정이 된 베흐론은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베크누로 가서 달즈 씨를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나그네를 따라 두 사람이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온 달즈 씨는 불문곡직 칼을 뽑아들었다.

"베흐론, 내 딸과 가족의 명예를 더럽힌 네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내가 죽으면 너는 사레흐를 아내로 맞아 우리 집의 가장이 될 것이고 네가 죽으면 사레흐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갈 것이다. 덤벼라!"

# 가상공간의 로맨티시즘과 영웅 체험

온라인 게임 '길드워'에 등장하는 위의 스토리는 가상 공간에서 만난 이성과 사랑에 빠져든 사용자가 느끼는 경험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라나도 에스파다’의 한 커플.

가상 공간은 차세대 영화라는 표현 그대로 "금지된 사랑의 열정이 갈등을 낳고 그 갈등이 죽느냐 사느냐로 치닫는다"는 로맨틱한 스토리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전통적인 영화와 다른 점은 사용자들이 이런 스토리에 직접 참여한다는 것이다.

위의 스토리에서 나그네 역할을 하는 사용자는 사위를 도와 장인을 죽이거나, 장인을 도와 사위를 죽여야 한다. 공연히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집안일에 말려드는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면서 사용자들은 차츰 가상 공간의 로맨티시즘에 동화되어 간다.

가상 공간에서 사용자들은 먼저 순애보와 금지된 사랑 등의 극적인 모티프로 이루어진 개발자의 스토리를 체험한다. 그리고 그런 체험의 과정에서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한국의 가상공간은 한 달 평균 2000쌍 이상의 공인된 커플들을 탄생시킨다. 이 커플들은 서로 연인 반지를 교환하고, 약혼식 및 결혼식을 치르며, 용을 타고 신혼여행을 간다. 함께 사냥을 하고 미션을 수행하며, 멀리 떨어져 있다가도 결혼반지를 이용한 순간이동(텔레포트)으로 즉시 결합한다.

가상 공간의 연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현실의 연인으로 발전하며 나아가 현실의 부부가 된다. 2003년 10월 '리니지'에서 거행된 엘스다 군과 이쁜이하나 양의 결혼식, 2005년 4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거행된 엘카이저 군과 엘 양의 결혼식, 2006년 6월 '다크에덴'에서 거행된 스콜라이언 군과 모카향도넛 양의 결혼식은 이러한 예이다. 이런 결혼식은 가상공간의 도시를 축제의 분위기로 물들인다.

한편 현실의 부부들이 가상공간으로 들어와 사랑을 확인하기도 한다. 온라인 게임 '그라나도 에스파다'의 엔젤화이트 부부, 바하무트 부부, 베르사 부부 등이 이러한 예이다. 가장 먼저 커플 시스템을 도입하여 '라앤(라그나로크 애인)'이란 용어까지 만들어낸 온라인 게임 '라그나로크'도 인월, 조조 부부를 비롯하여 많은 현실의 부부들이 활동하고 있다.

가상 공간은 현실의 병행세계(parallel world)로서 현실과 나란히 존재하는 삶의 터전이다. 사용자들을 가상공간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게임을 하고(Gaming)와 사회적 교제를 하고(Socializing), 스토리텔링을 한다는(Storytelling) 세 가지의 흥미 요소다. 이 가운데 남녀의 사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스토리텔링이다.

만남은 우연이지만 사귐은 필연이다. 가상 공간에서 보고 또 스스로 만들어가는 스토리텔링은 이 필연성을 창출하는 배경이 된다.

신화학자 죠셉 캠벨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영웅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영웅 체험이란 한 인간이 악당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영혼에 깃든 어둠과 싸우면서 고통을 겪고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스토리를 말한다. 신화에서부터 소설과 영화, 게임에 이르는 모든 스토리들은 이러한 영웅 체험의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끊임없이 스토리를 즐기고 소비하는 이유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이러한 영웅 체험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한 여자가 한 남자를 포용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영웅 체험으로 체득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돈과 출세라는 속물적인 가치에 의해 규격화되어버린 현실의 사회는 한 인간에게 영웅 체험을 제공할 능력이 없다. 가상 공간이 현실의 병행세계이면서 동시에 현실보다 더 우월한 세계인 이유는 그것이 영웅 체험을 제공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가상 공간에서 사용자들은 끊임없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모험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시련을 겪으면서 자기 안에 잠자고 있던 영웅성을 깨닫고 지혜와 용기를 붙잡는다. 사용자들은 '리니지2'의 바츠 해방 전쟁에서처럼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가 순교하기도 하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카자크 공격대처럼 공략 불가능한 보스 몬스터를 정복하기 위해 길고 긴 여정을 떠나기도 한다.

사랑은 이성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본능적인 반응에서 시작된다. 스스로 영웅 체험을 하고 타인의 영웅 체험을 보는 사용자들은 현실에서 잊어버린 이러한 반응을 회복한다. 현실에서 "좋은 남자가 없어요!" "좋은 여자가 없어요!"를 외치던 사람들이 가상공간에서 영혼의 동반자를 찾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글=이인화 교수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소설가>

취재 및 연구보조=신새미.임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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