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건강] '우울증' 밥맛도 살맛도 안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4면

마음이 울적하다, 잠도 잘 안온다, 남들은 낄낄거리면서 웃고 즐기는 일도 나는 전혀 재미가 없다, 매사에 의욕이 없고 집중을 할 수가 없다, 먹고 싶은 음식도 없고 솔직히 밥 먹는 것도 귀찮다, 지금도 되는 일이 없지만 앞으로도 내게 좋은 일은 있을 것 같진 않다, 희망이 안보이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 않을까 … 혹시나 당신은 이런 생각 때문에 괴롭진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우울증일 가능성이 크다. 해결책은? 하루 빨리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것이다.

상황이 힘들면 누구나 좌절감을 느끼면서 우울한 상태가 되게 마련. 그렇다면 당신은 '요즈음처럼 경기도 나쁘고 실직 위협이 상존(常存)하는데 한번쯤 우울한 감정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라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울적한 기분과 생각 때문에 늘상 해오던 일상생활이 힘든 상태가 2주 이상 지속된다면, 그래서 어느날인가 일에서 손을 놓아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면 당신은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또다시 '이런 현상은 드물지 않은데 우울증은 흔한가'란 질문을 던질 것이다. '흔하다'가 정답이다. 분당 서울대병원 하규섭 교수는 "가장 심각한 주요 우울증도 평생 유병률이 10% 정도"라며 "여성 환자가 남성보다 2배 이상 많다"고 말한다.

그러면 우울증 환자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병원을 찾을까. 결혼생활 8년 만에 우울증 진단을 받은 M씨(35)의 예를 보자. 결혼 후 줄곧 시부모를 모시면서 고부갈등에 시달렸던 그녀. 1년 전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누우면서 일상생활의 고통이 심해졌다. 살림살이에 환자의 병 수발과 지속적인 짜증까지 받아줘야 했기 때문. 급기야 석달 전부터 M씨는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두통.불면.피로감 등이 생겼다. 참다 못해 방문한 내과에서 각종 검사를 해봤지만 결과는 '이상 없음'으로 나왔다. 곧바로 남편은 일하기 싫어 생긴 꾀병으로 몰아쳤고 M씨의 증상은 심해졌다. 고통에 시달리던 M씨는 언니에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고, 언니의 손에 이끌려 마침내 정신과를 찾게 됐다.

담당 의사는 우울증이라고 진단하고 조금만 더 방치했으면 그녀가 자살시도를 했을 거라고 설명했다. M씨는 두 달간 입원해 약물치료를 받았고 비로소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남편은 치료에 적극 협조하게 됐다. 그나마 M씨는 늦게나마 성공적인 치료를 받은 운 좋은 경우다.

현재 국내에서 우울증을 제대로 치료 받는 환자는 4명 중 한명꼴. 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과 이민수 교수는 "우울증인 줄 알면서도 치료를 안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무슨 병인지 몰라 치료를 못받는 경우가 더 많다"고 들려준다.

우울증을 방치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우선 당장 일상생활이 힘들어져 직장인은 회사 생활이, 주부는 살림살이가 벅차고 힘에 부치게 된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지고 결국 '나는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이러고 살면 뭐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살을 결심하기 쉽다.

우울증도 종류가 있을까. 물론 있다. 가장 흔한 경우가 실직.빚.사별.이별 등의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작용해 발생하는 신경증적 우울증. 이보다 심한 우울증이 주요 우울증으로 불리는 정신병적 우울증이다. 이교수는 "신경증적 우울증은 자기의 마음 상태가 병적이라는 점을 알고 좋아지고자 노력한다"고 지적한다. 반면 정신병적 우울증은 스트레스와 무관하게 발생할 수 있으며 자신의 병이 심각하다는 인식이 없다. 병식(病識)이 없다 보니 치료받을 생각도 안한다. 또 근거 없이 '남들이 나를 싫어한다'는 식의 피해망상에 빠지거나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정신병적 우울증의 특징이다.

65세 이상 노인에게서 나타나는 노인 우울증은 대부분 배우자.건강.돈.친구.자식 등의 상실이 발병 동기가 된다(표 참조). 따라서 노인이 말수가 적어지고 식욕이 뚝 떨어지면서 주변정리를 하는 등의 변화를 보일 땐 주의깊게 관찰해야 한다.

조증과 울증이 공존하는 조울증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우울증도 있다. 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홍경수교수는 "조울증 환자는 계절을 타 우울증상이 주로 가을.겨울에 나타난다"면서 "한번이라도 조증이 나타난 환자는 지금 우울증 증상이 있더라도 조울증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조증 (躁症)은 기분이 지나치게 들뜨고 자신만만해지는 병. 기운이 넘치고 스스로를 과신해 무리한 사업확장.과소비.지나친 성생활 등을 하다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우울증 치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교수는 "우울증은 마음의 병이 아니라 세로토닌.도파민 등 뇌의 신경전달물질이 감소해 생기는 뇌 질환이라 항우울제 복용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약은 '해피메이커(Happy Maker)'로 불리는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 통상 2~3주 치료하면 증상이 호전되며 2~3개월 치료하면 정상적인 감정상태로 돌아온다. 물론 증상이 좋아져도 약물 복용은 적어도 6개월~1년 이상 해야 한다.

조울증은 기분 안정제인 리튬, 항경련제인 카바마제핀.발프로익산 등과 함께 항우울제를 보조적으로 사용하는 치료를 받게 된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권혁재 전문기자

*** 우울증 증상들

▶ 옛날 생각이 많이 나면서 후회도 되고 원망스럽거나 서운한 일이 자꾸 떠오른다.

▶ 쓸데없이 잔걱정이 많아졌다.

▶ 내 자신이 보잘것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감이 사라졌다.

▶ 머리가 잘 안돌아가고 집중력.기억력.판단력 등이 떨어졌다.

▶ 몸이 무겁고 처지면서 행동이 둔해졌다.

▶ 기분이 울적하다.

▶ 매사에 재미나 흥미가 없어졌다

▶ 무슨 일을 하건 의욕이나 관심이 없다.

▶ 식욕이 떨어졌다.

▶ 미래에도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전혀 안든다.

▶ 잠을 잘 못잔다.

▶ 죽고 싶다, 죽어야겠다는 등 자살 충동이 일어난다.

※이런 증상이 5개 이상, 2주 이상 지속되면 우울증을 의심하고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함. 자료:분당 서울대병원 정신과

*** 노인 우울증의 특징

▶ 배우자의 죽음.건강 상실.경제적 궁핍 등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 우울감보다 여기저기 아프고 소화가 안되는 등 신체증상이 더 뚜렷하다.

▶ 치료기간이 일반 성인들보다 2배 이상 길다.

▶ 내과적 질병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 누군가 나를 싫어하고 해칠거라는 피해망상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자료: 고대의대 안암병원 정신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