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영준의 시시각각

아프가니스탄이란 이름의 타산지석

중앙일보

입력 2021.08.24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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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난 15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는 아프간인 640명이 미 공군 C-17 수송기에 발 디딜틈 없이 앉아 있다. 공식 최대 탑승 인원은 134명 이지만 아프간인들이 후방 적재문으로 몸을 밀어넣어 탑승했다. [로이터]

지난 15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는 아프간인 640명이 미 공군 C-17 수송기에 발 디딜틈 없이 앉아 있다. 공식 최대 탑승 인원은 134명 이지만 아프간인들이 후방 적재문으로 몸을 밀어넣어 탑승했다. [로이터]

사이공 함락 9일 전인 1975년 4월 21일. 대통령 직을 내던진 구엔 반 티우(응우옌반티에우)가 미군 비행기에 올랐다. 그가 트렁크를 옮길 때마다 금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베트남의 치욕”이라며 지면에 옮길 수 없는 육두문자로 티우를 비난하던 구엔 카오 키(응우옌까오끼) 전 부통령도 일주일 뒤 현금 3만5000달러를 챙긴 채 티우의 뒤를 따랐다. 그로부터 46년 뒤 카불 함락을 뒤로하고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이 미군 헬기에 올랐다. 챙겨 온 돈가방을 헬기에 다 싣지 못해 일부는 활주로에 버리고 떠났다고 한다.
 역사는 때로 반복된다. 역사가 주는 교훈을 바로 보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이다. 2021년의 아프가니스탄은 1975년 베트남의 판박이다. 20년간 수많은 젊은이의 피땀과 막대한 달러를 쏟아붓고도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미국이 발을 빼자마자 맥없이 카불이 함락되는 과정에서부터 사생결단의 탈출극이 일어나는 결말까지가 모두 그랬다.
 동족상잔의 참화를 겪은 우리에게도 데자뷔로 다가온다. 콩나물시루와 같은 수송기 내부는 흥남 철수를 떠올리게 한다. 어찌 그게 전부이겠는가. 총 들고 완장 찬 탈레반 전사들이 가가호호 찾아가 부역자를 색출하고 즉결 처형하는 현실은 70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가니 대통령의 동생이 탈레반에 협력을 다짐하며 함께 찍은 사진이 어제 아침 신문에 실렸다. 그가 ‘샤이 탈레반’이었다가 커밍아웃한 것인지, 바뀐 세상에 재빨리 적응한 것인지, 목숨의 위협 앞에 굴복한 것인지 내막을 알 순 없지만 형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적으로 갈라선 건 우리가 70년 전에 겪었던 그대로다.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친구는 없다”는 진부한 진실을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다시 일깨워 준다. 지구 어디든 달려가 불량 정권을 제거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이식하면 세계 평화가 온다는 원리주의적 발상에서 벗어나 현실 노선으로 돌아선 미국이 탈레반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을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머잖아 올 듯도 하다. 구호자금과 경제 협력 등의 수단을 동원해 탈레반을 온건 노선으로 변화시키는 게 차선의 해법이란 현실론이 대두되고 있으니 말이다.
 남의 나라 불행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건 우리의 몫이다. 1973년 키신저가 방한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자신이 산파역이 된 남북 베트남 간의 파리 평화협정을 자랑스레 설명했다. 그러자 박정희가 잘라 말했다. “이제 월남은 끝났구먼. 끝의 시작이오.”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다. 지난주 수요일자 중앙일보 1면의 헤드라인은 “미군만 철수하고 평화협정은 휴지가 됐다”였다. 지난해 2월 미국과 탈레반이 맺은 평화협정을 되짚은 기사였다. 그런데 이런 유의 기사나 논의들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적잖이 있는 듯하다. 하루속히 종전선언을 체결하는 것이 한반도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고 믿는 과도한 신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교훈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보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상정하고 한반도의 비극을 예상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자 과도하게 공포를 조장하는 것일 수 있다. “세계 6위의 군사력과 10대 무역대국인 한국과 지금의 아프간을 비교한다는 것은 험담”이란 송영길 민주당 대표의 말은 틀린 게 아니다. 하지만 주먹 센 사람이 실전에서 항상 이기는 게 아니란 것 또한 틀림없다. 미국의 국력에 비하면 말 그대로 한 줌 밖에 안 되는 탈레반이 20년 와신상담 끝에 미국을 돌려보낸 현실이 이를 입증한다. 핵을 가진 북한은 미국이 원하든, 원치 않든 한반도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려고 한다. 실제 그런 날이 오면 자신들이 한반도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산지석을 보지 못하면 누구라도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게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주는 교훈이다.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20년 버틴 탈레반 못이긴 미국 / 힘센 자가 질 수 있음을 입증/ 한반도에 주는 교훈 직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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