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386의 청와대 노랫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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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04년 5월 29일 똑같은 청와대 영빈관.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의원은 4월 총선 당선자 축하 만찬을 열었다. 모두가 대승(大勝)에 들떴다. 한 여성은 대통령을 끌어안았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대통령과 당이 한 몸…", 김근태 전 원내대표는 "대통령의 입당을 열렬히 환영"이라고 했다. 386 운동권 출신 20여 명이 앞에 나갔다. 운동권 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곡은 천천히 낮게 시작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곡이 "산 자여 따르라"에 이르자 어떤 이는 눈물을 훔쳤다. 대통령도 따라 불렀다. 전대협 간부였던 P의원은 "청와대 복판에서 그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회고했다. 대통령은 조용필의 '허공'을 불렀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대통령은 미래를 예감했던 것일까. 대승도, 축제도, 386의 노래도 모두 2년 만에 허공에 흩어졌다. 386들은 당의 시체 옆에서 얼이 빠져 있다. 2년 전 봄, 운동권 출신은 선거의 보증수표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얼굴을 돌린다. 386 간첩단 혐의 사건까지 튀어나왔다. 386은 이제 거추장스러운 계급장이 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들의 실패는 전선적(戰線的) 사고 탓이다. 그들은 전승국(戰勝國)이 되어 세상을 마음대로 바꾸려 했다. 이른바 4대 개혁입법에 매달렸다.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개정, 언론관계법 제.개정 그리고 과거사기본법 제정이었다. 그들은 "보안법을 박물관으로 보내자"며 멀쩡한 국회를 쑤셔댔다. 그들이 그럴 때, 386 운동가들은 북한 대남공작부서 요원들을 만나고, 민노당에 들어가 미군기지 반대를 선동하고 있었다. 그들의 외침대로 보안법이 없어졌으면 지금 386 간첩 혐의 적발도 없을 것이다.

5.31 선거 대패 후 운동권 출신 의원들은 외부 인사들을 불러 토론회를 열었다고 한다. 전대협 간부 출신인 백원우 의원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감옥에 다녀왔고, 노 대통령의 의원 시절 비서관을 지냈다. 그는 토론회에 대해 "우리가 전선적 사고로부터 전진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많았다"고 전했다. 그는 "우리가 국민연금 개혁 같은 미래적 과제에 천착했더라면 많은 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386 의원들은 지금 생존의 문제에 부닥쳐 있다. 이대로라면 다음 총선에서 떨어질 것이 뻔하다. 이들은 여러 생각을 한다고 한다. "정치는 모른다. 통합신당이든 리모델링이든 새로운 말을 타고 붙어 보면 누가 아나" "운동권의 힘은 생존력이다. 떨어지면 학원 같은 거 차리면 되잖니"…. 전대협 의장 출신인 어느 의원은 술에 취하면 "언제 우리가 국회의원 생각이나 했나. 빨리 그만두고 내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간첩 사건이든, 여당의 실패든 386을 도매금으로 얘기해선 안 될 것이다. 사람마다 언행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386들이 잘못할 때 '일어나 외치는' 동료 386이 없었다는 건 더 큰 잘못이다. 자신들은 낙선해도 똑똑한 머리로 학원을 차리면 되겠지만, 그들이 남겨놓는 역사의 흙탕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김진 논술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