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두우칼럼

DJ에 앞다퉈 경배하는 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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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그러다 보니 은연중 오만해졌나 보다. 이제 미국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로 돼 가는 듯하니 말이다. 경제대국 일본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야 일제 36년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라고 치자.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비위를 사사건건 건드리는 것은 중국과 프랑스.러시아도 하지 않는다. 북한조차 미국을 겁내 관계 개선에 목을 매는데, 한국은 오히려 미국과의 동맹을 걷어차지 못해 발버둥을 치고 있으니 희한한 일이다.

북한 핵실험 이후 이런 분위기를 형성한 선봉에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포용정책의 효용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게 됐다"며 대북정책의 수정 입장을 표시하자 "햇볕정책이 무슨 죄냐"며 가장 먼저 반격에 나선 게 DJ다. '핵실험은 미국 탓'이란 북한의 주장이 활개 치도록 만든 1차적 책임도 DJ에게 있다. 정작 DJ 자신이 대통령 직에 있을 때에는 미국의 힘을 잘 알기에 삼가 조심했으면서 퇴직한 지금은 노 대통령에게 미국과 맞서라고 등을 떠민다.

최근 호남 방문 길에 DJ가 보인 모습은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는 전남도청 방명록에 '무호남 무국가(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라고 썼다. '이충무공 왈'이란 구절이 덧붙여진 것은 그로부터 2~3분 뒤였다. 기자들이 그 해석을 놓고 설왕설래하자 방명록을 다시 가져오게 해 추가한 것이다. 참으로 민망스러운 광경이었다. 충무공의 말씀을 옮긴 것에 불과하니 오해하지 말라고? '여우도 죽을 때엔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둔다(수구초심.首丘初心)'는데 노정치인이 고향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게 무슨 잘못이냐고? 그 글이 어떤 파장을 미칠지 몰랐다고? 그 글을 쓴 순간 DJ는 지역감정의 피해자가 아니라 수혜자였음을, 전국적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호남 지도자에 불과했음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 됐다.

그런 DJ를 향해 열린우리당의 대선 주자들이 앞다퉈 줄을 선다. 김근태 당 의장, 정동영 전 당 의장,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이 그들이다. 민주화에 헌신했으며, 동교동계의 발호에 반기를 들었으며, 정도를 가기 위해 외롭게 싸웠던 사람들이 말이다. DJ 햇볕정책을 소리 높여 찬양하면서, "여당 비극의 씨앗은 민주당과의 분당에 있다"는 DJ의 말에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화답하면서 말이다. 현직 대통령에게는 "정치에서 손떼라"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전직 대통령에게는 "정치에 개입해 달라"고 애걸하는 모습은 희극적이다. 그 압박에 못 이겨 현직 대통령도 사죄 전화를 하고 김대중도서관에 후원금을 내더니 드디어 DJ를 직접 방문해 경배 대열에 동참하기에 이르렀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DJ가 가진 호남에 대한 영향력 때문이다. 호남 표가 탐나기 때문이다. DJ와 노 대통령을 만들어낸 세력을 다시 끌어 모은다면 재집권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한나라당 연대로 냉전수구 세력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거나 "재집권이 지상과제"라는 건 당신네의 관심사일 뿐이다. 기적을 만들어온 한국 국민은 "산업화와 민주화, 그 다음은?"이라고 묻고 있다. 지나간 시대의 구호는 이제 아무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도 아직 '열린우리당+민주당+고건 전 총리'에 연연하고 있는가. DJ의 축복의 손길을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는가. DJ를 극복하지 못하면 결코 정치 지도자로 설 수 없다. DJ를 넘어서지 못하면 제대로 된 야당조차 하기 어렵게 된다.

김두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