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다음달 신당 창당 선언… 정계개편용 '가건물' 짓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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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전 총리가 2일 충북 청주시 미래희망포럼 사무실에서 열린 언론간담회에서 국민통합 신당 창당 의사를 밝히고 있다. [뉴시스]

2일 고건 전 국무총리의 신당 추진 선언이 열린우리당에서 찔끔찔끔 터져 나오던 정계개편론을 덮어씌웠다. 고 전 총리가 특유의 간접 화법을 버린 것이다. 대신 자기 입으로 12월께 창당 입장을 분명히 하자 열린우리당 쪽에선 "이번엔 진짜인 것 같다"며 촉각을 세웠다.

◆ 장외에서 장내로=여론 지지율상 이명박.박근혜씨와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의 신당 선언인 만큼 재.보선 참패를 거듭한 끝에 우후죽순으로 나오고 있는 열린우리당 내 논의보다 파괴력이 클 것으로 정치권에선 받아들이고 있다.

이날 발언으로 고 전 총리는 단숨에 '범여권 정치 무대'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오랫동안 껴입었던 '장외 주자'의 외투를 활짝 벗어 버렸다. 고 전 총리 측은 "고 전 총리가 반(反)한나라당 세력을 결집하는 범여권 대표 선수의 티켓을 따는 진검승부에 들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고 전 총리는 '범여권 대표 선수'가 되는 길에 들어서면서 세 가지 입장을 내놨다.

첫째, 기존 정당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내 신당 세력들이 추구하는 '열린우리당+민주당+고건 세력'의 3자 연대 방식을 거부했다. 자기 깃발 아래 '헤쳐 모여식' 창당을 하겠다는 것이다.

둘째,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한 친노 세력과 선 긋기를 분명히 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는 이날 "정부의 잘못 때문에 나라가 어려워져 신당을 하려는 것" "노 대통령은 국정에만 전념해 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셋째, 김대중(DJ) 전 대통령과의 일정한 거리두기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한 말씀을 그대로 믿고 있다"고 했다.

세 가지 입장이 선명하게 관철된다면 그의 길은 상당한 힘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눈길 위에 첫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는 '만년 2인자' 이미지나 '무임승차' 이미지를 불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 전 총리의 이런 입장은 열린우리당의 신당 창당파를 자극했다. 열린우리당은 정계개편의 노선을 둘러싸고 신당 창당파와 리모델링파가 있다. 이 중 호남 출신 의원을 중심으로 한 신당파 일부가 '고건 신당'의 참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래픽 참조>

이렇게 되면 범여권의 개편이 열린우리당이 아니라 고 전 총리를 중심으로 전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페이퍼 컴퍼니 신당 아닐까"=문제는 고 전 총리가 얼마나 의지를 갖고 자신의 말들을 실천에 옮길 것이냐다. 고 전 총리는 신당 창당 구상을 밝히면서도 어떤 세력들을 주축으로 신당을 만들 것인지 구체적인 청사진을 내놓지 못했다.

정치권에선 "고 전 총리가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는 지지율 반등을 위해 '깜짝쇼' 같은 고육책을 쓴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말을 이렇게 해 놨으면 그를 따르겠다는 국회의원들이 있어야 힘을 받는데 그런 기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실체가 없는 '페이퍼 컴퍼니' 신당 아니냐"는 의구심도 제기된다.

DJ와의 거리두기가 가능하겠느냐는 반문도 있다. 고 전 총리 지지의 핵심 기반이 호남이다. 최근 DJ가 노골적으로 호남의 대표임을 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 전 총리가 과연 DJ와의 차별화를 앞세우면서 독자적 세력화를 모색해 나갈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다.

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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