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군비분담 싸고 갈등심화/미 강요에 떨떠름한 서유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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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계산근거 제시안해 의혹/미측 요구액도 백억불 넘게 “오락가락”
한달반을 맞고 있는 페르시아만 사태의 장기화조짐이 짙어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막대한 군사비 분담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서유럽우방간의 미묘한 갈등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
미군이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수행하고 있는 「사막의 방패」작전에 투입되는 막대한 군사비를 놓고 양측은 「책임분담론」과 「대표과세론」을 각각 내세우며 갈등을 빚어왔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서유럽국 일각에서 미국이 주장하는 막대한 군사비의 타당성 자체에 대한 의문마저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냉전시대 서구우방들과 방위비분담문제를 논의할 때 사용하던 「책임분담」이란 용어를 다시 거론하며 페만지역에 대한 미군파병 및 유지에 들어가는 막대한 돈을 혼자 부담할 수 없다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10일 브뤼셀에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외무장관들과 만난 베이커 미 국무장관은 책임분담을 다시 강조하며 서유럽우방들의 직접적인 군사비분담을 재차 촉구했다.
이 자리에서 베이커장관은 망명쿠웨이트 정부가 50억달러를 부담하는 것을 비롯,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ㆍ아랍에미리트등 페만 3개 당사국이 총 1백20억달러를 분담키로 했다고 밝히면서 서유럽국들도 이에 상응하는 재정적 지원을 해야 한다는 뜻을 비쳤다.
1백20억달러중 절반은 미군의 「사막의 방패」작전에 쓰고,나머지 절반은 요르단ㆍ이집트ㆍ터키 등 이번 사태로 경제적 손실이 큰 중동국들에 대한 경제지원에 쓴다는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서유럽국들의 반응은 매우 신중하다못해 다소 냉소적이라는 느낌마저 들게 하고 있다. 서유럽국들은 「대표없이 과세없다」는 의회민주주의의 고전적 명제를 인용하면서 미국의 부담이 큰 것은 이해하지만 미군파병에 따른 부담은 어디까지나 미국이 져야할 문제지 다른 나라가 그 부담을 대신해줄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7일 로마에서 열렸던 EC(유럽공동체) 12개 회원국 외무장관회의에서도 이들은 「대표과세론」원칙을 재확인하고 미국의 군사비분담 요구를 사실상 거부했다. 다만 대 이라크경제봉쇄조치로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는 요르단ㆍ이집트ㆍ터키 등 3개국에 약 20억달러의 경제지원을 결정했을 뿐이다.
「사막의 방패」작전에 쏟아부어야 하는 미국의 부담규모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것도 서유럽국들이 미국의 책임분담요구를 회의적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당초 미 국방부는 이달 말로 끝나는 90회계연도에만 25억달러가 소요되고,내년 회계연도에는 총 1백13억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추산했었다.
얼마후 미 행정부는 새로운 소요추정액을 내놓았는데 미군파병ㆍ유지비로 1백80억달러,요르단등 3개국 경제지원비로 1백억달러 등 모두 2백80억달러로 부담규모가 늘어났다. 그러나 이것도 또다시 수정돼 미 국방부의 최신보고는 순수하게 「사막의 방패」작전 수행경비로만 한달에 약 10억달러가 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무런 계산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 숫자가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문제지만 만일 미 국방부의 최신 전망대로라면 이미 사우디등 3개 당사국으로부터 지원받기로한 1백20억달러(그 중 절반이 미군파병ㆍ유지비)만으로도 금년 소요경비는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는게 아니냐는 것이 서유럽국들의 의혹어린 시각이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자기부담아래 스스로 세계질서를 유지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미국은 주장하고 있다. 더이상 공짜점심은 없으며 각자 먹은 점심값은 스스로 부담하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은 브래디재무장관을 우리나라에까지 보내 미국의 군사비 분담을 요구했다.
브래디장관의 순방국으로 미국이 무슨 기준으로 프랑스ㆍ영국ㆍ일본과 함께 우리나라를 택했는지는 알길이 없지만 미국의 노력을 이해는 하되 지원액수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다는게 우리정부의 입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동평화를 통한 세계 에너지공급원의 안정적 유지를 내세우며 서방국들에 군사비분담을 요구하는 한편으로 미국은 이집트같은 새로 확인된 우방에 대해 70억달러의 군사차관 탕감을 추진하고 있다.
위기의 한가운데서도 들어올 돈과 쓸돈을 냉정하게 따지는 「위기의 경제학」을 부시행정부는 유감없이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동서냉전의 종식과 함께 「평화배당금」을 호기있게 논의하던 세계는 또다시 「평화분담금」을 걱정해야하는 우울한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파리=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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