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란과함께읽는명사들의시조] 김동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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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김동리(본명 김시종) 선생은 열일곱 살 때 신문지상에 시를 먼저 발표하고, 소설보다 시가 먼저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인이다. '무녀도''사반의 십자가' 등 한국 소설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낳은 그는, 1933년 스물한 살 때 두 살 아래 미당 서정주와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스물다섯 살 되던 해부터는 미당.김달진 등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하며 시.시조.소설.평론을 막론하고 문학사에 돌올한 업적을 남겼다.

3수 1편의 연시조 '광릉에서'는 세조가 잠든 경기도 남양주 광릉에서의 감회를 노래한 것이다. 첫째 수는 수목 우거진 풍광을 순순한 묏등을 향해 경배하듯이 그려냈고, 둘째 수에선 대군으로 머물러야 할 사람이 인륜을 저버리고 왕이 된 사연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산에 찬 풀과 나무야' 옳고 그름 가리지 않겠지만 세인의 평가에서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인 세조에 대한 원망이 없을 수 없다. 셋째 수에서는 '어진 신하도 쉬 오가지 못한' 단종의 유배지 영월 땅 두견이가 광릉 숲에 와 풀어놓는 구슬픈 소리를 듣는다.

이 짧은 시조에 오백 년 조선의 가장 슬픈 역사가 들어 있다. 세조의 명으로 단종에게 사약을 받들고 갔던 왕방연의 시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자시니/저 물도 내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와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의 '간밤에 울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내거다/이제야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저 물이 거슬러 흐르과저 나도 울어 예리라'도 이 슬픈 역사가 낳은 시조다.

김동리 선생을 비롯하여 이광수.김소월.양주동.이희승.서정주 등 근현대 작가들은 장르를 불문하고 창작했거니와, 무엇보다 시와 시조를 갈라 세우지 않았다. 미당 또한 현대 시조 중흥을 '비는 마음'에 담아 2수의 연시조로 노래한 바 있다.

'버려둔 곳 흙담 쌓고 아궁이도 손보고/동으로 창을 내서 아침햇빛 오게 하고/우리도 그 빛 사이를 새눈 뜨고 섰나니//해여 해여 머슴갔다 겨우 풀려오는 해여/5만원쯤 새경받아 손에 들고 오는 해여/우리들 차마 못본 곳 그대 살펴 일르소.'

그러나 60년대 이후 현대문학이 시조를 시문학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 소홀하면서 시조는 빛을 잃게 되었다. 배우지 못했기에 일선 학교의 선생님도 가르칠 수 없다. 우리나라 정형시는 교과서에 없다. 학생들은 질문한다. 아직도 고시조를 쓰느냐고. 학생들은 반문한다. 왜 학교에서 현대시조를 가르치지 않느냐고.

홍성란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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