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잔재(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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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본은 언제나 우리에겐 싫은 나라다. 광복이니,해방이니 하는 말 자체가 벌써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 10년후,다시 20년후,그 뒤 한 세대가 지나고,반세기가 가까워도 일본은 우리에게 좋은 나라의 인상이 아니다. 해마다 실시되는 국민의식조사는 한결같이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일본은 그런 나라로 점찍고 있다.
요즘 일본의 한 유력신문칼럼에서 읽은 얘기다. 한국여행중에 몹시 마음 아팠던 일은 한국사람들로부터 말끝마다 「일제시대」라는 소리를 들을 때였다고 한다.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이 오죽 아팠으면 아직도 「일제시대」라는 말을 일상어로 쓰고 있겠는가. 그 신문은 일제의 경험이 없는 젊은 사람들조차도 일제,일제 하더라고 했다.
역사속의 상처는 사람 마음속의 상처보다도 오히려 더 오래 가고 쉽게 아물지도 않는다. 시간이 가면 절로 잊혀지고마는 불쾌한 감정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일본과 우리의 관계는 특히 그렇다. 영국과 인도의 관계와도 다르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다스리면서 모질게 할 만큼 했다. 그래도 인도사람들은 영국을 그렇게 싫은 나라로 꼽지 않는다.
영국은 인도를 다스린 일은 있어도 일본처럼 군림한 일은 없다. 그 점이 다르다. 영국은 인도를 동화시키려는 노력과 강요는 하지 않았다. 사람의 이름을 빼앗고,민족의 자존심을 짓밟고,전통과 문화를 유린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지난날의 회상아닌 현실의 확인으로도 마음의 아픔을 느낀다. 요즘 서울대의 한 연구소가 「광복 45주년,국민의식」 조사결과를 보면 우리 주위엔 아직도 일제잔재가 적지 않게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는 사람이 자그마치 83.8%나 되었다.
특히 일제잔재가 많은 직업집단은 정치인,경찰,대기업,문화예술,법조인의 순이었다. 일제치하의 군림하던 일본 관리,인정사정 없던 일제경찰의 인상을 광복 45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정치인,우리의 경찰에서 그대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모독이요,슬픔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과연 무슨 광복을 했는가. 이제는 일본을 싫어하는 만큼 우리 자신속의 일제잔재의식도 싫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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