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신간회서 활약|천도교 4대 교주 박인호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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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8·15를 맞아 독립유공자로 독립장을 추서 받은 박인호 천도교 제4대 교주(1855∼1941)는 동학혁명, 3·1운동, 6·10만세 사건, 신간회 결성 등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다.
박 교주는 천도교의 명맥을 이어가는데 심혈을 기울인 교인으로서 역할이 더 컸으나 천도교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 때문에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3·1운동 때 박 교주는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으로 옥고를 치렀다. 1908년 제3대 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교주자리를 선위 받은 그는 3·1운동자금을 조성했다가 검거되었다.
천도교내의 위치로 보아 33인의 한사람이 되었을 그는 지도자 손병희 선생의 지시로 후선에 머물렀다.
계병희 선생은 3·1운동 전날인 2월 28일 『지금 세계종족평등의 대기운이 일고 있는 때 한마디 말도 없이 지나칠 수 없어 정치방면에 일시 진출하려하니 그대는 간부들과 함께 교무에 전력해달라』고 박 교주에게 유시하며 그에게 뒷일을 맡도록 남겨 두었다.
1922년 의암이 숨을 거두매 명실공히 천도교주가 된 박 교주는 l926년 6·10만세사건에 천도교인들이 참여하는 것을 내락했다. 천도교는 전국의 지방교구를 중심으로 6월 10일 일제히 봉기하도록 계획을 세우고 10만장의 인쇄물을 만들었다. 그러나 6월 4일, 이것이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간부 대부분이 연행되었다.
신간회가 결성될 때도 박 교주의 내명으로 권동진·이종린·박래홍·최준모·이기정·오일철 등 천도교인이 참여했다.
박 교주는 1936년 상경한 지방교인들에게 감왜기도를 하도록 비밀 지령했다.
「무궁한 내 조화로 개 같은 왜적 놈을 야간에 감하고서…」라는 문구를 아침저녁 기도 때 마음속에서 외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 같은 기도사실이 탄로되어 천도교 중앙간부와 지방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었다.
박 교주는 41년 86세로 타계했다.
박 교주는 충남 덕산군 양촌면 막동에서 태어나 일찍이 동학에 입도했다. 동학혁명 때는 약 5만의 동학군을 통솔하여 충남 일대에서 싸웠고 덕산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 1908년 종통을 이어 의암을 성수로 모시면서 박 교주는 그 밑에서 천도교를 이끌어 가는데 전념했다.
박 교주는 독립운동가로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천도교인으로 충실했으나 독립운동의 시기 시기마다 배후에서 지휘, 지원하는 민족세력의 거물이었다.
그의 양아들 박내홍은 신간회 운동에 앞장서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사람에 의해 피살되었다. 조카 박내원도 6·10만세사건에 연루됐다. 유족으로는 손자 박의섭씨(74)가 있다. <임재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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