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화 교수의 디지털 세상 ⑤ 가상 공간의 사회 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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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세계의 상업도시인 ‘제라’의 아귈론(上)과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아이언포지(下).

#가상 공간의 사회경제사

'리니지2'의 오픈 베타(소비자용 시험판) 가 시작된 것은 2003년 7월 9일이었다. 개발자들이 준비한 콘텐트는 빠른 속도로 소비됐다. 불과 35일 만에 리니지2 월드에서 가장 강력한 보스 몬스터였던 코어가 사용자들에 의해 정복됐다. 그러자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사용자들은 스스로 콘텐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용자들은 최고의 사냥터에 인접한 기란성에 개인상점을 열었다. 기란성은 개인상점 수백 곳이 들어선 상업적 중심지가 됐다. 곧 이어 이 거대 시장을 독점하는 지배혈맹이 나타났다. 지배혈맹은 유력한 혈맹들과 손을 잡고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연합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2004년 5월 제1서버의 바츠해방전쟁을 필두로 독재에 저항하는 민중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이 진행되면서 크라토스(Kratos), 즉 거칠고 원초적인 물리력만이 지배하던 가상 공간에 에토스(Ethos), 즉 모두가 존중해야 할 도덕적 가치들이 나타났다.

#본능적 질서와 확장된 질서

위의 사례는 많은 온라인 게임에서 반복되는 가상 세계의 사회경제사적 발전을 예시한다. 사용자들이 자생적 교역을 만들어내고 자생적 교역이 도시와 직업을 창출한다. 상업 도시를 지배하려는 정치 집단의 독재가 나타나고 그 반대편에 민주적인 질서를 원하는 민중들의 저항이 생겨난다. 전쟁이 일어나고 다시 평화가 찾아오는 역사의 반복을 겪으면서 가상 세계는 하나의 실체로 발전해간다.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는 자신의 주저 '치명적 자만'에서 사회에서 발전될 수 있는 두 가지 형태의 질서를 언급했다. 하나는 서로 잘 알고 있는 동료 사이에서 형성되는 의리와 인정의 본능적 질서다. 이러한 질서는 자연스럽고 고결하지만 자기 집단의 구성원에게만 적용되고 다른 집단에는 적용되지 않는 배타성을 갖는다. 한 혈맹에서 사랑받는 영웅이 혈맹의 울타리 바깥에서 무자비한 살인자로 경원시된다. '리니지''로한''R2'와 같은 온라인 게임들은 바로 이 같은 본능적 질서에 기초한 갈등과 대립의 스토리를 사회 진화의 중심 플롯으로 삼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작은 집단을 뛰어넘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협력할 수 있는 확장된 질서다. 예절이나 계약, 상거래와 같은 확장된 질서는 작은 집단을 하나로 묶어 주던 본능을 억압하지만 사람들을 거대한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한다. 현대 온라인 게임의 모체가 됐던 머드(MUD) 게임들, '심즈 온라인', 초창기의 '마비노기' 같은 게임이 이 같은 상호 협동의 스토리를 사회 진화의 중심 플롯으로 삼고 있다.

고도 정보화 시대의 서사시인 온라인 게임의 가상 세계는 인류사의 발전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미래의 유토피아를 예고한다. 먼저 가상 세계는 전자의 본능적 질서로부터 후자의 확장된 질서로 발전한다. 이러한 발전은 점점 더 정보화, 세계화되는 인류의 현재를 반영하고 있다.

온라인 게임 속의 가상세계에서 사용자들은 자생적인 경제거래와 상업도시를 만들어낸다. 이 같은 가상세계의 거래는 실시간으로 지구적 교역이 이뤄지는 현대사회를 반영한다. 사진은 게임 ‘마비노기’의 상업도시 던바튼.

가상 세계에는 '에버퀘스트'의 노라쓰, '리니지2'의 기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아이언포지, '마비노기'의 던바튼, '뮤'의 마야, '제라'의 아귈론, '썬'의 벨트헨 등과 같은 상업 도시들이 있다. 이 도시들은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허구가 아닌 경제적 실체다.

에스펜 아세트의 연구에 따르면 2005년 현재 이런 도시들에는 하루 평균 3000만 명 이상이 상주하고 있다. 사회적 가상 세계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현실 국가인 러시아의 1인당 GNP(세계 77위)에 필적한다. 이 도시들의 상품(아이템) 거래액은 한국의 경우 2005년 1월에 1조원을 넘어섰다.

가상 세계의 상업 도시들은 물건과 사람, 자본, 정보가 실시간으로 국경의 벽을 넘나들면서 전 지구적인 규모로 개방되는 현대를 반영한다. 다국적화되는 기업 활동은 공장이나 인력, 본사와 같은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게 가상화된다. 이러한 기업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치적 주권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 국가(virtual state)화돼 가고 있다.

오늘날 낡은 유형의 주권국가는 인터넷에 의해 분초로 뒤바뀌는 무역수지의 수량적 관리조차 불가능하다. 21세기를 지배하는 것은 작은 영토와 공업생산력을 가지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와 기술, 지식에 의지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상 국가다. 한 뼘의 영토도 없이 번영하고 있는 가상 세계의 상업 도시들은 개방과 규제완화를 통해 철저하게 가상화된 국가만이 시대의 다이너미즘에 부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동시에 가상 세계의 사회는 인간의 자연스런 애정과 문화적 규칙이 화합하는 유토피아를 보여준다. 사용자들은 가상 세계에서 반드시 현실 세계보다 더 나은 대안적 세계를 요구한다. 시장 경쟁이 이뤄지면서도 차별이 아닌 차이가 존중되는 도시. 사람을 만나는 것에 어떤 목적도 없으며 사람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광장. 언제 접속해도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있는 혈맹과 길드. 가상 세계의 형상들은 본능적 질서와 확장된 질서가 조화되는 인류의 사회적 이상을 앞당겨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글=이인화 교수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소설가>

취재 및 연구보조=신새미.임하나


가상 세계의 사회적 특징은

가상 세계는 또 하나의 사회다. 21세기 인류는 묵시록적인 영화에서처럼 스스로 만든 매트릭스에 갇혀 말초적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고 또 하나의 인간적인 사회를 창조했다. 가상 세계는 피가 있고 살이 있고 영혼이 있는 인간의 사회, 현실보다 더 자유롭고 더 민주화된 상상의 사회다. 가상 세계의 사회적 특징들은 아래의 다섯 가지 개념으로 정리된다.

①공유 공간(Shared space)=가상 세계는 많은 사용자가 참여할 수 있도록 공유된 공간을 갖는다. 콘솔 게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넓은 광장과 광장에 모여 있는 수많은 군중의 생기발랄한 모습은 가상 세계만의 매력이다. 상점, 경매장, 창고, 길드 아지트, 성장을 위한 수련장, 병원, 순간이동 포스트,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는 성소 등이 이러한 공유공간에 들어선다.

②즉시성(Immediacy)=가상 세계는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원하는 사물이 실시간으로 조달된다. 이러한 즉시성은 가상 세계를 조작하는 현실 세계의 실시간성과 연결된다. 한국에 사는 사용자가 미국에 있는 이베이(e-bay) 사이트에서 중국인 작업자들이 만든 게임 머니를 신용카드 온라인 결제로 구매하면, 독일에 사는 중개업자가 5분 안에 게임 안으로 게임 머니를 배달하러 달려온다.

③영속성(Persistence)=가상 세계에는 공간과 사물이 사용자의 의지에 독립해 영속적으로 존재한다. 가상 세계의 시장에서는 현실금액 60만원의 갑옷('뮤'가이온 갑옷 16옵셋-인챈트9), 현실금액 350만원의 활('리니지2' 영혼의 활-인챈트8), 현실금액 1000만원의 칼('리니지'싸울아비 장검-인챈트9)이 실제로 거래된다. 이러한 재화의 가치는 그것의 상태 정보가 서버에 영구히 저장돼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거나 변화하지 않는다는 영속성 때문에 발생한다.

④공동체(Community)=가상 세계에는 반드시 사용자들이 활동하는 사회적 집단이 존재한다. 사용자들은 거대한 역사적 격동 속에서 저마다의 실존적 삶을 꾸려간다. 이러한 실존은 사냥을 같이 하며 친해진 친구들, 친목과 오락을 즐기는 길드 같은 사회집단 속에 놓여 있다. 이 때문에 공동체 생활의 갈등도 생겨나며 집단에 의한 개인의 강제 추방, 척살, 캐릭터 봉인도 일어난다.

⑤상호작용성(Interactivity)=가상 세계는 사용자들의 행동에 의해 변화한다. 가상 세계의 사용자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자신의 필요를 가지고 그들 자신의 법칙에 따라 부지런히 움직인다. 사용자들이 움직이는 플레이어 캐릭터는 독자적인 의지를 가지고 자신에게 닥쳐올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행동한다. 이러한 사용자들의 행동에 의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며 가상 세계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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