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자식 농사"에 얽매이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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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주부 김정희씨 (32·서울 개포동)는 최근 딸 하나만으로 만족하고 둘째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했다. 친구나 같은 아파트에 살고있는 젊은 주부들이 『자녀를 많이 낳으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희생하고 양육에 시간을 바쳐야 하는데 그런 힘든 일을 왜 또 하느냐』는 다소 이기적인 충고에 나름대로 동감했기 때문이다.
대학 강사로 일하고 있는 이미경씨 (30·서울 당산동)는 네살난 아들을 남편과 친정부모에게 맡겨두고 여름방학동안 유럽으로 여행을 갔다. 유럽의 대학들을 둘러보고 새로운 자료를 모으는 것이 여행 목적이었다.
이처럼 「무조건적인 희생」 「헌신적인 사랑」으로 상징되던 모성상이 최근 들어 점차 변모하고 있다. 자녀를 위해 평생을 다 바쳐 살던 여성들이 잊고 지냈던 「나」를 되찾고 「나 자신의 인생」을 구가하려는 몸짓을 서서히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꼭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 경우도 출산 후 자녀의 양육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직장을 계속 다닌다든가, 「전업주부」 일지라도 자녀를 놀이방이나 탁아소에 보내고 뭔가를 배우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20∼30대 젊은 주부들은 이전의 어머니들이 조그마한 것이라도 자신을 위하는 일을 할 경우 느끼던 미안함이나 죄책감에서 조금은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인간 교육 실현 학부모 연대 공동 대표 박혜란씨는 『부모·자식간의 관계를 다르게 설정하는 인식의 변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풀이한다. 즉 이전에는 자식이 곧 나의 모든 인생이며 따라서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해 「자식농사」를 잘 지어야만 자신의 인생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던 데서 이제는 자식은 나와 별개의 독립된 인격체며 나의 삶은 따로 존재한다고 믿는데서 생겨난 새로운 추세라는 것.
얼마전 「자녀란 무엇인가」라는 TV토론에 출연한 주부들이 「부모는 자녀의 친구」며「자식은 부부 생활의 윤활유」이지 자식이 재산이거나 짊어져야 할 업보는 아니라고 대답한 것도 바로 이런 사고를 반영한 예로 볼 수 있다.
「헌신적인 어머니」에서 「자아를 추구하는 어머니 상」으로의 변화는 비단 여성들에 의해서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자녀들도 예전의 살림만 잘하던 어머니 보다 자기의 삶을 가꾸는 일에 나름대로 열심히 몰두하는 어머니를 더 원한다는 것.
주부 이혜근씨 (38·서울 서초동)는 어느날 학교를 다녀온 국민학생 아들이 『내 친구 엄마는 교수고, 또 다른 엄마는 피아노도 잘 치고 영어도 잘하며 컴퓨터도 잘하는데 엄마는 뭐냐』고 당돌하게 묻는 바람에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볼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이씨는 그래서 올 가을부터 컴퓨터학원·영어학원에 나가기로 했다.
딸을 낳은 뒤 다시 대학원 진학을 한 지영미씨 (31·서울 평창동)는 『유치원에서 딸이「우리 엄마는 공부를 잘하는 엄마」라고 자랑하며 의기양양해하자 「우리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다」고 자랑하던 다른 아이들이 일순간 굉장히 부러워했다는 말을 교사로부터 전해들었다』며 『자신이 하루 내내 딸을 돌봐주지 않아도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매우 모범적으로 보인 것 같다』며 흐뭇해했다.
여성 학자 정은씨는 『사회가 점차 개인주의화되고 따라서 여성에 대한 평가도 자녀나 남편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부 그 자신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당연한 추세』라고 분석하고 『주부들이 이제 겨우 자신의 삶을 위해 바삐 살아가는 모습을 이기적이라거나 모성애의 결핍으로만 비난할 것이 아니라 주부들도 「홀로 서기」를 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야할 것』이라고 말한다. <문경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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