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여에 남은 선택/권영빈(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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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폭력ㆍ날치기ㆍ파행국회로 일관한 150회 임시국회가 끝난지 1주일째로 접어든다. 그동안 제제다사들이 의정의 위기를 우려했고 의원들의 도덕성을 개탄했지만 한달 두달이 지나면 언제가 위기였고 누가 개탄의 대상이었던지는 까맣게 잊을 터다.
광복절 민족교류가 어떻게 진행될지,한소수교는 언제 이뤄질지,남북총리회담은 어떻게 될지에 눈이 팔리는 동안 세월은 흐르고 위기의식은 그럭저럭 넘어갈 것이다. 어제가 그러했고 오늘이 그런 것이 우리의 국회였고 정치판이 아니었던가.
바로 이 망각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다시한번 이번 파행국회의 위기실체가 어디서 연유했던가를 되짚어봐야만 한다.
많은 논자들이 우려하고 분석한 이번 임시국회의 문제점은 ①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은데 어째서 우리 국회의원들은 지난날의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당리당략에만 얽매여 있느냐 ②거여의 다수 횡포와 소야의 전면투쟁이 국회를 난장으로 만들었고 ③그 배후에는 아직도 대권의 꿈을 버리지 못한 양김이 당을 사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과연 그러한가. 임시국회가 파행을 거듭하고 급기야 의정의 위기로까지 치닫는 사태의 핵심이 바로 이런 문제뿐일까. 위기의 실체나 사태의 핵심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불과 두달전에 있었던 5월의 총체적 난국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당시 노대통령이 특별담화형식으로 발표했던 총체적 난국의 원인 분석은 ①거여창당과정이 국민에게 준 실망 ②정부의 일관성없는 정책에 대한 국민의 불신 ③전ㆍ월세값 폭등으로 인한 국민의 허탈감 ④물가불안ㆍ주가폭락ㆍ경제에 대한 국민의 불안심리 ⑤KBS장기제작 거부와 현대중의 불법파업이었다.
5개항의 위기원인 분석중 적어도 4개항은 3당통합과 정책의 부재 또는 혼선을 빚은 정부ㆍ여당이 원인 제공자였다. 국민에게 실망과 불신과 허탈감을 안겨준게 정부ㆍ여당임을 대통령 스스로 인정했고 정중한 사과까지 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위기원인에 대한 처방은 어떠했던가. 정부ㆍ여당의 난국책임은 49개 대기업에 몽땅 씌워져 대기업의 부동산처분이라는 미증유의 폭탄발표와 한소정상회담의 들뜬 분위기에서 총체적 난국은 사라지는 듯 했다.
재벌에 대한 국민들의 잠재적 적대감을 유발시킴으로써 위기상황을 희석시켰다. 오늘의 국회위기도 머지않은 장래에 그런 식으로 망각의 늪속에 잠재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거여의 밀어붙이기식 국회운영이 시작되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5월의 총체적 난국의 실체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조금도 해소되지 않은채 난국은 더 심화되고 증폭되고 있음은 웬일인가.
5월의 난국이나 7월의 위기실체는 여러 논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그런 원인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거여창당→내각제 개헌→장기집권이라는 인상을 풍기는 것이 실은 정치불안의 진짜 원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10%대의 국민적 지지밖에 받지 못하는 여당이 73%의 의석을 국민의 의사라고 강변하면서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힘의 과시를 한 것이 결국 5월의 난국을 심화시키고 위기를 증폭시킨 원인이 되는 것이다.
위기의 실체는 이미 3당통합에서 잉태되었고 잉태된 위기감이 5월 난국을 거쳐 7월 임시국회에서 눈앞의 현실로 표출된 것이다. 날치기 법안통과는 그 법안의 중요성과 시급성에 있기 보다는 더 이상 밀려서는 안된다는 힘겨루기의 모범,내각제 개헌을 위한 로드 쇼 또는 전야제라고 보기 때문에 야당의 무한투쟁을 유발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국민들은 국회를 불신하고 국회의원을 매도하며 정치에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거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좁아졌다. 때늦은 지금이지만 난국과 위기의 책임을 자신들에게 돌리고 그 난국과 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결자해지의 지혜를 동원해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선 누구보다도 노대통령이 후계자의 선정과 후계체제의 구축에 결코 연연하지 않고 있음을 명백히 천명해야 할 것이다. 거여→개헌→내각제구도가 국민적 신임과 호응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 없음을 이번 국회파동을 계기로 재확인했으리라 믿는다.
비록 내각제가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고 한들 이번 임시국회와 같은 파행적 절차와 과정을 거쳐서는 최악의 악법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다.
최선의 제도를 최악의 것으로 변질시키는데 왜 굳이 단임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노대통령이 그 악역을 담당해야 하는가.
거여가 장기집권을 꿈꾸고 후계체제에 연연하는 한 그 결과는 모두 파국으로 끝났음은 우리의 의정사가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부산 5ㆍ4파동을 거치면서 탄생된 거여 자유당의 말로,당권싸움에만 골몰했던 제2공화국 민주당의 파탄,10월 유신으로 거듭 탄생된 거여 민주공화당의 참담했던 종말과 아직도 기억에 생생할 5공국회의 정부 들러리 역할….
거여체제가 이제라도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후계체제의 미련을 버리고 과도기적 민주화의 초석을 쌓는다는 민주개혁 작업에 착수하는 일 뿐이다. 현안의 쟁점으로 부각되었던 지자제실시와 보안법ㆍ안기부법의 개정에 선도적 역할을 자임하는 수 밖에 없다.
위기와 난국의 실체가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3당통합이 개혁을 위한 구국적 결단이었다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길이 먼듯하면서도 가장 빠른 길임을 우리의 얼룩진 의회사가 증언하고 있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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