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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다 강당서 보는 학생운동/김두겸(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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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출장길에 옛 동경대의 상징이자 일본 학생운동의 심벌이었던 동대 야스다(안전) 강당을 둘러 보았다. 21년전 학생과 경찰의 충돌로 파괴된채 방치되어 있다가 최근에 와서야 개보수공사를 끝내 본래의 모습을 말끔히 되찾고 있었다.
개보수 기념식에서 아리아케(유명) 동대총장은 「지금까지의 강당모습은 동대에서 있었던 학원분쟁의 후유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었지만 이번의 개보수는 학원분쟁의 종결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고 전한다.
2차대전후 근 35년여에 걸쳐 격렬하기 짝이 없었던 일본의 학생운동도 비로소 완전히 끝났다고 보는 시각이다.
동대투쟁­.
1968년 1월29일 동대의학부 학생회등이 인턴제도 폐지등을 내걸고 무기한 파업에 돌입함으로써 시작되어 끝내는 「전국학원투쟁」으로까지 번진 이 투쟁은 1959년의 이른바 「안보투쟁」과 함께 일본의 대표적 2대학생운동으로 꼽힌다.
당시의 상황이 주마등같이 뇌리를 스쳐갔다.
의학부학생들의 파업ㆍ교수폭행→학교측의 학생퇴학처분→야스다강당 점거농성→경찰기동대 투입등으로 확대,악순환되면서 「전학생 공동투쟁회의」(전공투)가 발족된다. 1년여에 걸친 투쟁과 협상과정에서 「일반학생」과 타학교학생도 가세한 「일부과격파학생」으로 구분되고 전원유급의 위기속에서 전공투핵심멤버 3백77명만이 마지막까지 버틴다.
69년 1월18일 오전 7시. 야스다강당 시계탑위엔 여전히 적기가 휘날리고 있다. 이윽고 건물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8천5백명의 경찰기동대가 의자등으로 바리케이드가 쳐진 강당으로 진입한다.
옥상에선 돌과 화염병이 우박처럼 쏟아진다.
경찰은 3천발이 넘는 최루탄을 발사했고 장갑차ㆍ살수차는 물론 마지막단계에선 헬리콥터까지 동원됐다. 치열한 공방전은 장장 34시간 동안이나 계속됐다.
다음날인 1월19일 오후 5시. 저항학생 전원이 물에 흠뻑 젖은 채 끌려 나왔다.
강당벽은 곳곳이 화염으로 그을렸고 강당 내부 대부분은 심하게 파괴됐다. 대리석벽과 나무바닥은 투석과 바리케이드용으로 쓰기 위해 거의 다 뜯겨졌고 교실마다 방화의 상처를 남겼다. 그 유명한 백화들도 참화를 피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볼썽사나운 강당을 20여년간이나 그대로 내버려둔건 당시에는 『고쳐봤자 학생들이 또 부술텐데…』하는 논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 못지않게 개보수할 돈이 없어 그냥 놓아두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번에 든 개보수비용은 총 8억엔 (약 40억원). 이 비용 전액을 루지(부사)은행과 야스다생명보험등 야스다그룹의 4개회사가 부담했다고 한다.
새로 단장된 야스다강당을 둘러 보면서 당시 학생운동의 투쟁목표는 무엇이었던가,그들은 과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던가,학새운동 주도세력들의 그후는. 일본학생운동은 그후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가 하는 것들을 다시금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일본학생운동과 우리의 학생운동과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그들이 남긴 교훈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도 떠오르게 했다.
당시 전공투의 첫째 투쟁목표는 「대학관리지배의 논리와 체계」에 대한 반발이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를테면 「대학의 자율화」를 강조하면 강조할 수록 학생들의 실제 권리는 더욱더 쪼그라들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분노였다는 것이다.
「대학의 자치」는 바로 「학생운동의 규제」를 전제,학교운영은 교수회에 맡기고 학생은 오로지 면학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고전적 가치관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음을 힘으로 거부했던 것이다.
투쟁의 둘째목표는 다수결원리,자치회민주주의,의회민주주의 등에 대한 고발이었다고 평가한다.
일본의 노동운동 및 혁신운동은 50년대 후반 이후의 고도성장과 때를 같이 하여 체제내투쟁으로 전환된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어디까지나 「헌법질서속의 투쟁」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전공투핵심 멤버들은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평화」라는 미국핵우산 아래에서의 평화공존,그리고 「민주주의」도 4년에 한번 국민이 겨우 주권을 행사하는 의제적인민주권이라고 해석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체제에 순응하는 모든 세력,심지어는 일반시민까지도 적으로 간주했다.
두번째 투쟁목표,즉 시민사회를 폭력으로 거부한 것은 그들이 오히려 시민사회로부터 배척당하는 역작용을 낳아 그들의 투쟁 역시 대중적 기반을 잃게 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여기서 전공투는 해체→재편→강화의 수순을 밟지 않을 수 없었고 이중 폭력해방을 추구하는 일부가 69년 8월 「적군파」를 결성,끝내 총으로 무장한 군인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일본학생운동이 남긴 교훈도 비교적 명료해진다. 그들이 시민사회의 유동성,탄력성을 인정않고 시민사회가 이미 체제속에 용해돼 버렸다고 단정한 셈이다.
그리고 그 시민사회=체제라고 보고 이를 공격함으로써 오히려 시민사회로 하여금 공권력에의 의존도를 강화시켰고 그것은 곧 시민사회의 우경화를 촉진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우리의 경우 「6ㆍ29」는 학생,재야,야당세력이 주도한 것이었지만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호응이 있어서 비로소 쟁취할 수 있었음은 누구도 부인 못한다.
그리고 헌법질서와 시민사회를 부정하는 과격투쟁은 그나마 이제 겨우 싹트기 시작한 이 땅의 혁신운동마저도 짓밟아 버릴 수 있다는 역설을 20년전의 일본 학생운동은 가르쳐주고 있다.<국제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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