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치개혁, 국민 손에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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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정치 드라마가 또다시 시작됐다. 한나라당의 전 재정위원장은 1백억원이라는 거액의 불법 선거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대통령의 한 측근은 11억원을 수수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야당 인사와 대통령 측근이 검은 돈 때문에 조사받고 처벌받는 일들은 정부가 바뀔 때마다 늘 보아온 장면들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엄정한 조사와 처벌, 고해성사와 개혁이라는 귀에 익은 다짐들이 제시되지만, 이번 사건이 정치부패 드라마의 마지막 회일 것이라고 믿는 국민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적극적인 역할 없이는 우리는 정치부패의 악순환을 끝낼 수 없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보면, 불법 선거자금을 포함한 부패 스캔들은 대개 몇몇 거물 정치인과 대통령 측근의 처벌, 이를 둘러싼 여야 간 공방, 검은 돈을 건넨 기업인의 처벌, 그리고 이어서 사회적 관심의 급속한 증발이라는 표준 코스를 밟아왔다. 다시 말해 불법자금에 대한 선별적인 처벌과 분풀이는 반복돼 왔지만 이것이 전면적인 개혁 드라이브로 연결된 적은 없다.

이는 근본적으로 부패 스캔들의 처리 과정과 후속 논의가 정치인들에 의해 독점돼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청와대와 여야가 함께 지난 대선자금을 고해성사하고 특별법을 만들어 과거의 위법행위들을 사면하자는 의견이 흘러 나왔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국민의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노무현 대통령도, 최병렬 대표도 반대의사를 밝히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하자면, 여야 정치권의 담합으로는 정치자금 개혁의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할 수 없다. 부끄러운 과거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정치자금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국민과 여야 정파가 두루 참여해 하나의 국민 협약(social contract)을 이뤄야 한다. 시민대표, 여야 정치권,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범국민정치개혁회의'와 같은 기구를 통해 이러한 협약을 만들어내야 한다.

범국민적 기구를 통해 개혁을 논의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무엇보다 개혁적인 정치자금 제도를 만드는 과정은 여러 목표들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선택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택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모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흔히 투명하면서도 공정하고, 그러면서도 돈이 적게 들어가는 정치자금제도를 원하지만, 사실 이처럼 만병을 한꺼번에 다스릴 수 있는 완벽한 제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투명성을 강조하다보면 미국의 경우처럼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정치자금이 공급되는 일이 발생한다. 또 검은 돈의 고리를 원천적으로 끊기 위해 모든 선거비용을 국가가 부담하다보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결국 이러한 상충하는 목표들 가운데 우리 국민이 가장 우선적으로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기 위한 공론의 장이 필요한 것이다.

범국민적 기구가 다루어야 하는 또 다른 문제는 이른바 과거사의 처리 문제다. 모두가 소리 높여 깨끗한 정치를 외쳤던 지난 대선이 끝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여야 모두 곤욕을 치르는 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치자금과 관련된 실정법 위반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은 그리 많지 않다. 결국 과거처리 문제는 전면적인 개혁의 시발점일 수밖에 없는데, 이 문제의 궁극적인 열쇠는 정치인도, 정부도 아닌 국민의 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자금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나라는 없다. 하지만 불법과 탈법이 만연하는 정치자금의 관행을 갖고서 선진민주국가에 진입한 나라도 없다. 국민의 현실감각과 함께 호흡하는 정치자금 제도와 관행이 정착될 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능력 있고 깨끗한 인물들이 정치에 진입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정치를 바꾸어 나가는 길이 된다.

장 훈 중앙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