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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의 수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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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이 버섯에 대한 일본인의 애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일본에서 "송이 드셨나요?"라고 묻는 건 품위 있는 가을철 계절 인사다. 일본인은 혀로 느끼는 맛보다는 송이의 향을 더 중시한다. 재래식 고급 종이인 와시(和紙)에 알맞은 크기로 찢은 송이를 싸서 휴대하는 전통도 있다. 1200여 년 전 편찬된 옛 시가집 '만요슈(萬葉集)'에 송이 향기를 찬미하는 구절이 나올 정도니 일본인의 송이 사랑은 이미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송이의 학명(Tricholoma Matsutake)에 일본어 마쓰타케(松)가 들어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북한에서 송이는 '전략물자'다. 한푼이 아쉬운 외화를 벌어주는 효자 상품이지만 더 없이 요긴한 외교 자원이기도 하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가을에 송이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고선 석 달 만인 9월 서울을 방문하는 특사의 손에 칠보산 송이 300상자를 쥐여 보냈다. 국내 시세로 10억원을 호가하는 양이었다. 때아닌 선물을 받은 한국의 유력 인사들이 '남북 화해의 상징'이라며 맛있게 시식했다는 소문은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

김 위원장은 2002년 9월 정상회담을 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의 귀국 비행기에도 송이 300상자를 실어 보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두둑한 인심을 과시한 송이 선물은 일본 도착과 동시에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TV 화면에 수상한 상자가 비치자 국회의원들이 연일 "납치 문제는 해결 못 하면서 도대체 뭘 받아 온 거냐"고 따진 것이다. 외교 기밀이라며 내용물 확인을 거부하던 정부는 결국 "신선식품인데 이미 처분했다"고 물러섰다. 행방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소각설이 유력한 가운데 "정부 고관의 배 속에서 '처분'됐다"는 풍문도 있다.

북한산 송이가 또다시 수난을 겪고 있다. 핵실험을 강행하는 북한 정권의 돈줄을 끊는다며 북한 상품 수입을 금지했기 때문에 제철 만난 송이가 갈 곳이 없게 됐다. 지난해 일본의 송이 소비량 가운데 북한산은 4분의 1(783t.17억 엔어치)을 차지했다.

핵폭탄이 터지면 하늘엔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 오른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일찍이 목격했던 바다. 선의로 보냈을 김정일 위원장의 버섯 선물에서 굳이 핵실험을 연상하고 싶진 않다. 풍미와 건강으로 즐기는 버섯이야 얼마든 좋지만, 버섯 구름을 목도하는 일은 인류에게 다시는 없어야겠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