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한치 앞이 안보인다 … 잠 못드는 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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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못한 북한 핵실험 변수가 터지자 그룹 총수의 뜻을 받들어 실질적으로 기업 경영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그룹 2인자'의 몸과 마음도 바빠졌다. 국내외 사업 현장과 그룹 기획부서에서 올라오는 각종 정보를 판단해 내년도 그룹 사업계획에 이를 적절히 반영할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가뜩이나 불투명한 경영 여건에서 앞을 내다보기 힘든 변수가 터져 '2인자'들은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어날 것 같다"고 말했다.

이학수 부회장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변수는 환율이다. 그룹 주력사인 삼성전자의 경우 해외 매출이 85%에 이르다 보니 환율에 따라 영업이익이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북핵 사태로 원-달러 환율이 올라가서 언뜻 수출에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돌발 변수에 따른 현상이어서 오히려 불확실성만 커졌다는 것이 이 부회장의 판단이다. 이 부회장은 "올해 경영은 고유가와 원-달러 환율 하락에도 불구하고 지난해보다 좋은 성과를 거둘 것으로 보이지만, 내년은 여러 불확실성으로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만큼 만반의 대비를 하라"고 임직원들에게 지시했다.

현대.기아차그룹의 박정인 기획조정실 부회장은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대외 신인도 하락을 걱정하고 있다. 특히 내년 미국 내수시장의 둔화 움직임 속에서 북핵 사태가 자꾸 부각될 경우 한국차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당장 16일 정몽구 회장이 직접 주재할 수출전략회의를 앞두고 북핵 변수가 향후 경영에 어떻게 작용할지 판단을 내리느라 다른 일은 미뤄놓다시피 하고 있다. 박 부회장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소비 및 투자가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며 "현재로선 사업계획을 수정할 단계는 아니라고 판단되지만 앞으로 국제 정세나 경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LG그룹의 지주회사인 ㈜LG의 강유식 부회장은 핵실험 보고를 받고 가장 먼저 챙긴 것은 전자 계열사의 부품 및 화학 계열사의 원료 수급과 수출 문제였다. 그룹 매출의 80% 이상을 수출로 올리고 있는 상황에서 해외 부품 및 원료의 안정적 공급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부 해외 바이어들이 벌써 LCD 등을 제대로 공급받을 수 있는지를 문의해 온다는 보고를 받고는 적절한 수급 물량 조절을 지시하기도 했다. 강 부회장은 "북핵 사태가 장기화되고 한반도 주변의 긴장이 계속 고조된다면 사업계획도 신축적으로 조정해야 하겠지만, 본질적인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경영활동은 지속해야 한다"며 그룹에 정상적인 업무 자세를 당부했다.

북한 핵실험 발표 다음날 오전 최태원 회장이 직접 나서 임원들의 브리핑을 챙긴 SK그룹도 사실상 비상체제다. 대표 계열사인 SK㈜의 신헌철 사장도 전략기획 부문 임원들을 급하게 소집해 에너지 수급 및 환율 전망 등을 논의했다. 신 사장은 "사태의 방향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예단할 수는 없지만, 불안과 혼란이 지배하는 상황은 아닌 듯하다"고 진단했다. 따라서 현재로선 사업계획의 전면 재검토나 수정 작업을 할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 사장은 "그러나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기업의 실적 저하, 투자 축소, 외자유치 등에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신 사장은 경제 주체들이 믿음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도록 일관성 있고 지속적인 정책 집행으로 불확실성을 줄여 달라고 정부에 당부했다.

이현상.김태진.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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