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방 운영하는 경비아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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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약(藥), 물 수(水)….”
12일 오후 울산시 북구 중산동 경동그린아파트 관리실 한켠에 있는 공부방 ‘나눔의 글방’에서 초등생 10여명이 자신들의 학교 이름을 한자로 배우는 소리가 낭낭히 흐른다.

다섯평 남짓한 이 공부방의 훈장님은 이 아파트 경비원 조남훈(62)씨. 공부방이 문을 연지 불과 사흘밖에 안되지만 134가구가 사는 아파트 주민 자녀중 60명이 등록, 더이상 받아줄 공간이 없어 한발 늦은 주민들이 발을 구르는 형편이다.

조씨의 강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2시간으로 자신이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갈고닦은 글짓기와 생활 한자 등 2개 과목. 경비원 근무를 하면서 틈틈히 그날그날의 교재를 만들고 하루 12시간의 근무가 끝나자마자 오후 7시부터 강의를 해야하는 부담이 여간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에게 이런 일을 하도록 기회를 준 주민들이 고맙다고 했다.

“정년 퇴직을 하고 집 뒤를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서 ‘저 기차가 막차겠지. 내 인생도 저렇게 지나가버리는구나 ’싶은 심정이었어요. 그런데 주민들의 도움으로 공부방을 열고 나니 떠나던 기차가 되돌아온 듯 가슴이 뛰더라구요.”

조씨는 1백만원 남짓한 월급을 받는 경비원에 불과하지만 아파트 자치회장(안은주·43)씨가 “아파트의 격을 높일 수 있는 인물”이라며 삼고초려로 모셔온 좀 특별한 사람이다. 26년간 잘 나가는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임원(1998년 한화석유화학 여수공장 훈련원장)까지 역임했고, 6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 ‘잉여촌’동인으로 활동중이다.

안씨는 “아까운 인물이 특별한 일 없이 소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경비를 맡아달라고 했더니 ‘관리실 옆 빈 창고를 공부방으로 쓰게 해달라’는 조건을 달더라고요. 굴러온 복을 마다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주민들이 조씨가 출근을 시작한 8월부터 반상회를 열어 공부방 마련에 들어가자 주변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도배는 한화석유화학 울산공장에서 맡아줬고, 칠판은 조씨가 직장생활 때 봉사활동을 하면서 안면을 익힌 메아리학교(농아학교)에서 선물했다. 또 이웃 약수초등학교에선 조씨가 무료로 복사기를 쓸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곳에서 조 씨는 시험에 필요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치겠다고 한다. 무엇보다 매일 글을 읽히고 독후감을 쓰게 하고, 생활한자를 재미있게 가르칠 것이라고. 동시도 짓게 해서 1년 뒤엔 동시집을 펴낼 계획이라고 한다.

안은주 자치회장은 “이름도 모르는 변두리 아파트에 불과하지만 공부방을 만든 그 힘이 씨앗이 돼 앞으로 따뜻한 마음과 사람 사는 냄새가 가득한 아파트로, 그래서 울산에서 가장 살기 좋은 아파트가 될 것”이라며 부푼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울산=이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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