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붕괴 불안감에 김일성 때부터 집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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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북한 핵실험으로 인해 온 세계가 떠들썩하다.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그동안 북한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달라고 줄기찬 요구를 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이를 외면했고, 이에 대해 북한은 핵실험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통해 온 세계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물론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북한은 왜 그토록 핵 보유를 염원한 것일까. 그 연원은 1953년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일어난 스탈린 비판운동으로 인해 김일성이 큰 곤욕을 치른 데서 시작된다. 소련에서의 변화는 김일성 비판으로 이어졌고, 김일성은 주변 강대국과 너무 깊은 관계를 유지하면 권력이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1955년부터 김일성은 '주체'를 표방하여 강대국의 입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순을 밟았다. 핵심은 대외적으로는 '자주'를, 대내적으로는 김일성의 절대 권력화였다.

'자주'를 위해서는 정치.경제.군사.외교 등 모든 면에서 막강한 국력이 필요했다. 특히 군사적 자주는 매우 중요했다. 김일성은 미래 전쟁은 대량살상 무기에 의한 것이 될 것이고, 그 대상은 물론 미국일 것으로 생각했다.

50~60년대 소련의 대미 '투항주의' 및 중국의 대국주의적 태도로 보아 북.미 간 전쟁이 발생할 경우 한국전쟁 시처럼 자동개입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김일성의 판단이었다. 김일성은 56년부터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보였고, 우수한 두뇌들을 핵물리학자로 양성했다. 그 결과 정확하지는 않지만 현재 2000여 명의 우수한 핵물리학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사용가능한 핵무기를 보유한 시기는 사회주의권 붕괴로 인해 체제 유지가 불안했던 90년대 초인 것 같다.

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로 인해 추가 핵무기 개발은 잠시 주춤했으나 그 염원은 멈추지 않았다. 95년부터 북한은 경수로 제공의 지지부진을 비난하면서 내밀히 핵무기 추가 개발을 추진했다.

북한의 예상대로(?) 경수로 공급은 중단되었고, 핵무기 보유를 기정사실화할 명분이 발생했다. 물론 6자회담을 통해 북한의 안전보장이 담보됐다면 양상은 달라졌겠지만 그 가능성이 없자 지난해 2월 10일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고, 9.19 공동성명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북 제재가 강화되자 이번 핵실험을 통해 자신이 핵 보유국임을 과시했다.

결국 북한의 핵실험은 정상적인 외교를 통한 안전 보장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핵 보유를 통한 안전보장 확보에 그 목적이 있었다. 주민들의 자긍심 제고를 통한 주민통합이라든가 미국과의 직접 대화 획득 등은 부수적인 목적에 불과하다. 이제 북한은 누가 인정해주든 말든 '김일성의 소원'대로 핵 보유국이 되었다. 따라서 좋든 싫든 향후 북한 핵 확산 방지와 핵무기 폐기를 위한 국제회담이 개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일 핵 보유국 지위가 인정되지 않고 대북 압박이 지속된다면 북한은 제2, 제3의 도발을 감행할 것이다. 이 경우 가장 큰 경제적 피해자는 한국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미국과 북한이 극적 대타협을 할 경우에도 우리가 대규모의 대북 경제 지원 담당자가 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대북 정책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국민 모두의 지혜가 필요한 때다.

전현준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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