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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배명복칼럼

불확실성에 빠진 동북아 안보질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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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북한이 강행한 핵실험으로 동북아 정세는 살얼음판 신세가 됐다. 미국.중국.일본 등 주변국들의 대응에 따라 동북아 안보질서에 일대 지각변동이 초래될 수 있는 불안한 상황이다. 북한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고, 거기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북핵 문제의 본질은 절대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될 정권이 핵무기를 손에 넣었다는 데 있다. 핵 비확산 체제의 불평등.불공정성을 문제 삼아 북한이 핵 주권을 주장하는 것은 공허한 논리다. 누구도 힘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이다.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입장은 분명하다. 핵무기와 정권, 둘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북한의 체제 전환을 추구해온 미국 내 매파로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다. 더 이상 고민할 것 없이 김정일 정권의 붕괴를 향해 매진할 수 있게 됐다. 군사적 조치를 배제한 이상 유엔 안보리 결의를 통한 봉쇄와 제재로 북한을 고사(枯死)시키는 일만 남았다.

문제는 제재의 효과다. 북한은 이미 제재에 길들여진 나라다. 북한의 생명선이나 다름없는 중국과 남한이 작심하고 동참하지 않는 한 제재는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안보리 결의와 여론의 압력 때문에 두 나라가 대북 제재에 나서기는 하겠지만 북한 체제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강하게 밀어붙이지는 못할 것이다. 북한 체제의 급격한 붕괴는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과 재난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봉쇄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핵으로 무장한 북한 체제가 목숨을 부지해나가는 불확실한 상황이 장기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우려되는 사태다. 이 경우 일본 여론이 핵무장 쪽으로 돌아설 수 있다. 핵을 보유한 중국.러시아.북한 등 대륙세력과 미국의 핵우산에 의지해야 하는 해양세력 일본의 비대칭적 상황은 일본에 핵무장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핵무장은 필연적으로 남한의 핵무장을 불러올 것이고, 대만의 핵무장을 재촉할 것이다. 악몽의 시나리오다.

한.일 양국의 핵무장은 미.일과 한.미 동맹을 축으로 한 동북아 안보 질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이 동북아의 새로운 대립축으로 부상하면서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이 위협받게 될 것이다. 또 대만의 핵무장 가능성은 양안(兩岸) 관계에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동북아의 핵 도미노로 비확산 체제는 조종(弔鐘)을 울리면서 이란은 물론이고 시리아.터키.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연쇄 핵무장 사태로 이어질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다. 따라서 미국은 북한의 핵실험으로 야기된 동북아 질서의 불확실성을 서둘러 제거하는 쪽으로 상황을 관리해야 한다. 그 방법은 북한과의 막후 협상뿐이다. 겉으로는 국제사회와 공조해 대북 제재에 나서면서 물밑으로는 북한과의 대화 창구를 열어놓아야 한다. 중국이 후원자 겸 중재자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핵 뇌관을 제거하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은밀하면서 노련한 협상술이 요구된다.

해답은 이미 6자회담의 '9.19 공동선언'에 나와 있다. 공동성명의 이행을 통해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미.일과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 또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동아시아 전체를 포괄하는 다자 안보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아무리 혐오스럽더라도 김정일 체제를 인정하고, 개방과 개혁을 통한 변화의 길로 유도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핵실험은 역사의 심판을 받을 위험한 도박이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북한 주민들에게 참기 힘든 고통을 강요하고 있다. 그렇다고 북한 체제의 붕괴를 기다리며 손을 놓고 있기에는 상황이 너무 위중하다. 대북 압박이 불의의 사태로 발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화가 곧 유화는 아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협상할 수 있는 것이다.

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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