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특별기고] 디지털 시대에 더 빛나는 한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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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고창수 교수.한성대학교 한국어문학부

21세기 지식 문화 사회의 핵심 역량은 디지털 미디어에 기반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디지털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가운데, 삶의 질을 높이는 콘텐트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바탕으로 창조.교환된다. 이른바 '문화 기술'이 지배하는 디지털 미디어 세상에서 우리는 새로운 정보 혁명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20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산업화에 뒤져 있던 우리나라가 짧은 기간에 지식 사회의 중심 국가로 성장한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바로 한글이다.

한글의 강점은 우선 '배우기 쉬운' 문자 체계라는 점이다. 우리나라가 근대 산업 국가로 단기간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한글 보급, 즉 문맹 퇴치에 따라 정보 대중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된 덕분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 선언문에서 "모든 백성이 쉽게 배워 날마다 쓰는 데 편안케 하고자 한다"고 밝힌 의도에 걸맞게, 한글은 정보 대중화에 아주 적당한 배우기 쉬운 문자 체계이다. 유네스코가 문맹 퇴치 공로상을 '세종대왕상'으로 정한 것은 우리나라의 비약적인 정보 대중화가 한글에 크게 힘입었다는 것을 인정한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배우기 쉬운' 문자라는 한글의 첫 번째 강점은 한글이 지니는 두 번째 강점, 즉 '정보화에 유리한' 문자 체계라는 점과 연결된다. 이는 디지털 시대에 한글을 더욱 빛나게 하는 핵심 요인이다. 자국 언어를 정보화하는 일의 중요성은 더 없이 크다. 한자와 가나를 혼용하는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 패한 한 원인으로 타자기를 활용한 알파벳과의 정보전에서 뒤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다. 한글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기계식 타자기에 입력이 용이한 음소 문자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쉽게 IT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이다. 중국어.일본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정보 대중화 능력을 태생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한글 정보화의 과정에는 어려움도 있었다. 20세기 후반까지 한글 기계화는 몇 가지 숙제를 안고 있었는데, '타자기 표준 자판 논쟁'(2벌식이냐 4벌식이냐 등을 놓고 벌어짐)이나 '한글 풀어쓰기 논쟁'(초성.중성.종성을 나란히 늘어쓰자는 것) 등이 이러한 어려움을 잘 대표한다. 그런데 이같은 타자기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생긴 문제들은 성능 좋은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한글 창제 당시부터 이미 표기 원리에 내재되어 있던 '한글 오토마타'(한글의 초성과 종성을 컴퓨터가 자동적으로 인식하는 규칙)의 원리 덕분에 한글 컴퓨터 자판은 지금과 같은 2벌식으로 정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획(加劃.ㄱ에서 획수를 더하면 ㅋ과 ㄲ이 됨)'이나 '천지인'과 같은 한글 창제의 기본 원리는 현재 휴대폰의 자판 입력 방식으로 그대로 계승되었다. 결과적으로 현재와 같은 디지털 환경에서 우리는 일본어.중국어는 말할 것도 없고, 영어 알파벳 자판보다 더 우수한 원리를 바탕으로 편리하게 정보화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음과 모음의 자판이 분리되어 심리적으로 접근하기 쉬울 뿐 아니라 10개의 자판만으로도 손쉽게 글자를 조합할 수 있는 한글의 장점은 휴대폰 문자메시지(SMS) 서비스에 기반한 시장 영역을 점점 키우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모바일 인터넷이나 DMB 기기를 통한 정보의 생산과 교환 활동은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고 있다. 게임이나 영상물과 같은 엔터테인먼트 상품을 통한 정보 교환도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 다중 접속온라인 게임이나 VOD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서비스 형태가 그 예다.

앞으로는 사람과 거의 비슷한 의사소통 능력을 가진 인공지능 로봇의 등장도 예상된다. 이 모든 발전의 중심에는 언제나 '배우기 쉽고 정보화에 유리한' 한글의 강점이 빛나고 있을 것이다. 한글창제 560돌을 맞는 오늘, 시대를 앞서간 세종의 철학과 언어학적 비범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고창수 교수.한성대학교 한국어문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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