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의 거리·사물들만 시로 가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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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진해 중앙극장 앞의, 봄비에 촉촉히 젖은 포도에, 바람의 심술궂은 장난으로 몇 날을 앞당겨 떨어져, 숨소리도 없이 누워 있는, 애처로운 동백꽃송이에다 무심코 가래를 뱉곤, 순수한 것을 더럽힌 죄스러움에 낯을 붉혔습니다』 (「어느날5」중)
이생진 시인은 황선하씨의 이 시를 읽고 사물에 대해 소중히 하는 순결한 시인의 마음 때문에 시인인 자기 스스로를 뒤돌아봐 부끄러웠다는 내용의 시를 썼다.
55년 『현대문학』에 박두진씨에 의해 초회 추천돼62년 추천완료까지 무려7년을 끌며 문단에 나온 황선하씨(59). 그후 중앙문단에 거의 얼굴을 내밀지 않다 33년만인 88년『시인으로서의 자질에 대해 회의에 빠졌으며 이 시를 읽으실 분들께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만 같아 심히 죄송스럽다』는 후기와 함께 첫 시집 『이슬처럼』(창작과 비평사간)을 퍼냈다.
추천에 7년, 그리고 시집출간에 33년이나 걸린 것은 황씨의 시적 자질이나 게으름 탓은 아니다. 혹시 중앙문단을 기웃거리지나 않나 하는 것을 가로막는 시인의 순결한 혼 때문이다.
이 시집도 황씨가 원해서 출간된 것이 아니라 문학평론가 염무웅씨가 우연히 경남에서 발간된 문예지를 읽다 황씨의 작품을 「발굴」해 수채화처럼 담백하고 잔잔한 감명을 일으키는 고운 작품들에 반해 창비에 추천함으로써 이뤄진 것이다.
그는 이 시집과 일상생활을 통해 『현란한 수식어나 기교를 구사하지 않는 그의 시에는 가식과 허세를 모르는 그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 시란 바로 시인 자신의 총체적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는 평을 받고 있다.
황씨는 진해 벚꽃길, 마산의 불종거리 등 이 지역과 사물, 그리고 인생을 노래한 시들을 갖고 월1회씩 열리는 「낭송문학회」에 나가 향토 독자들과 만난다. 『우리 지역에도 훌륭한 발표무대가 많은데 왜 중앙문단을 기웃거립니까. 지방문학의 자존을 위해 중앙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황씨는 창원에 있는 경남여상에 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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