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일의 본질과 명분(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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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노대통령의 일본 방문이 일정까지 확정된 마당에 양국 당국자들 사이에 심각한 명분상의 이견이 노출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국과 일본처럼 욕된 과거의 유산이 모든 관계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는 국가관계에 있어서는 외교가 내정의 연장이라는 상식은 각별한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노대통령의 방일이 계획되고 추진되는 과정에서 이 점이 전혀 도외시된 느낌이 짙다.
첫째,우리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측 태도의 불성실성이다. 일본측은 한국에서 노대통령의 방일 무용론이 제기된 준비과정에서는 매스컴을 통해 이번에는 일왕이 84년 전 전대통령 방일때보다 강도높은 사과표시가 있을 것이라는 뜻을 비췄다. 그러나 그때까지 공식입장표명을 않고 있던 자민당이 일단 일정이 잡힌 다음에 일왕의 사죄발언이 84년 수준을 넘을 수 없다느니,심지어 정치문제에 일왕의 입을 빌리는 것은 애초에 옳은 일이 아니라는 주장까지 내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유인일왕이 84년에 그나마 유감의 표시를 한 전례까지도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일본당국자들의 기본자세는 한일관계를 과거 침탈과 유린의 과오가 없는 다른 나라와의 관계의 범주에서 취급하려는 인상을 짙게 풍기고 있다. 그러나 한국 국민이 가진 과거에 대한 치욕적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런 자세로는 이웃나라로서 미래를 지향하는 관계를 키워나가기가 어렵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둘째,한일관계처럼 민감한 국민감정이 개재되어 있는 외교에 있어서는 감정을 자극하는 공개적 외교공방보다는 실무자들간에 조용한 교섭을 선행시키고 중요한 대목에 가서 그 시말을 밝혀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방식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외교적 발언은 그 성격상 대내용과 대외용으로 구분되게 마련인데 한일관계는 그런 구분이 될 수 없는 특수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정상외교와 같은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이를 성사시킬 의지가 성실하다면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는 공개발언은 극히 삼가야 된다.
이런 시각에서 노대통령이 방일을 눈앞에 두고 일본 매스컴에 대해 공개적으로 직설적 표현을 쓴 것은 명분이나 대일본 외교자세의 원칙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앞으로의 회담분위기에 어떤 도움이 될지 의아심을 품게 한다.
노대통령의 방일이 국내의 불안과 일본의 불성실을 무릅쓰면서 이 시기에 실행될 필요가 없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고 있는 점을 감안해서 정부는 이번 방문이 왜 그처럼 절실한 이유를 국민들에게 밝히고 납득시킬 필요가 있다고 우리는 본다.
지금까지 공개된 것은 일왕의 성실한 사과표명과 재일동포들의 법적지위 정상화 이상의 구체적 내용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 보다 더 절실한 본질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국민이 알아야 하며 그런 문제가 방일논의의 핵심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지 못하고 지금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들만 놓고 마치 그것이 방일목적의 전부인 양 공개적인 논쟁만 벌인다면 그렇지 않아도 나쁜 양국 국민감정만 더욱 악화시키고 결국 노대통령의 방일을 납득할 수 있는 근거조차도 크게 훼손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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