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 소나무-지난 제2부 줄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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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영남유림산 사건으로1년 6월의 형을 받은 석주율은 고문 후유증으로 부산 감옥에서도 하루 한두번씩 실성증을 보여, 면회온 누이 선화도 잘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감방 생활을 수도하는 자세로 임해 다른 죄수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이 된다. 1년6개월 동안 감방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 견문을 넓히기도 한다. 특히 캐나다 선교사 엘릭 목사를 통해 기독교를 접하고 신약성경의 그 단순 명쾌한 논리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그래서 출옥 후 자비와 사람의 실천을 통해 농촌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1918년 1월,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주율은 마중 온 두 중과 함께 다시 표충사로 들어간다. 그는 절에서 4개월을 보낼 동안 방장승의 의술로 치매증의 완치를 보자, 홀연히 복지행을 결심하고 길을 떠난다. 만행의 목적은 절 생활의 청산을 뜻하고, 고행을 통해 세속의 견문을 더 넓히자는데 있다. 백두산 정산에 올라 자연의 웅혼함에 감격하고, 간도로 들어온 조선인 유랑민의 처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기도 한다. 대종료 총본사를 방문하여 독립군 소대장이 된 곽돌과 누님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독립운동의 길이 무력투쟁에 있다고 설득받으나 주율은 이를 거부한다. 명동촌에서 김약연을 찾아 뵙고 자력갱생으로서의 점진적 민족운동의 설교에 크게 깨우친바가 있다.
1919년, 국내로 돌아온 석주율은 광명서숙 함명돈 교장의 고향인 울산 청량면에서 정착하여 농촌운동을 벌이고 서당을 통해 교육사업에 헌신함으로써 자기의 갈 길을 찾는다.
그래 2월 2년 형기를 마치고 부산 감옥에서 출옥한 백상충은 경성에서 내려온 장경부의 사총늘 통해 3·1운동이 이어날 것임을 보고 받는다. 백상충은 박효문·장경부와 함께 상경하여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현장을 목격하고 만세 시위에 뛰어든다. 사흘 뒤 울산으로 내려온 백상충은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모의한다.
석주율은 3·1만세운동이 비폭력 평화적인 독립운동이란 저메 자신의 신념과 일치됨을 알고 울산 남창 장날의 만세운동에 앞장을 선다. 그러나 그는 곧 체포되고 만다. 이어 벌어진 울산 읍내와 가까운 병천 장날 만세운동에 백상충·박효문이 체포되어 군중 앞에 작도로 처형된다.
백상충 역시 2년 6월의 중형을 선고받고 부산 감옥으로 이감된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던 중 심장병을 앓아온 처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장인 조익겸으로부터 전해 듣고 낙담한다.
김원일 최연석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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