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한국기업 공사현장에 가보니… 해 떨어지자 3000명 동시 식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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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건설 이집트 카이로 건설현장의 한국인 직원들이 26일 2000명 동시 수용 규모의 라마단용 특별 텐트식당에서 현지 근로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이집트인들이 25일 카이로 알무니라의 이슬람 사원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타라위'라 불리는 이 의식은 라마단 기간 중 특별행사로 하루의 마지막(다섯 번째) 예배가 끝난 뒤 바로 열린다. [카이로 AP=연합뉴스]

무슬림(이슬람교도)에겐 다섯 가지 종교적 의무가 있다.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라고 하는 신앙고백(샤하닷).예배(살라).자선(자카트).단식(사움).성지순례(하지)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단식은 매년 이슬람력으로 9월 한 달간 낮시간에만 이뤄진다. 일출부터 일몰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 단식하며 신의 은총에 감사하는 성스러운 행사다. 낮에는 물 한 모금도 엄격히 규제하지만 일몰 뒤에는 마음껏 먹는다.

따라서 라마단은 금식과 포식이 공존하는 이슬람 고유의 문화다. 이집트 카이로 외곽의 카타미야 사막 지역에 위치한 삼성건설 카이로아메리칸대학(AUC) 신축공사 현장의 한국인 임직원 18명은 단식보다는 급식에 더 신경 쓴다. 낮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일한 3000여 명의 현지 무슬림 근로자가 일몰 직후 일제히 저녁식사를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근로자들과 더불어 해 본 하루의 단식이었지만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니었다. 찌는 더위 속에서 힘든 일을 하면서도 갈증을 참아내는 그들의 신앙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현장 근로자들은 모두 합숙소에서 생활한다. 삼성 직원들은 이들 3000명이 낮시간의 단식을 마치고 똑같은 시간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이 벌어지기도 한다. 지난해 라마단엔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배식을 자유롭게 받도록 놔뒀더니 국에서 고기를 더 건져 먹겠다는 사람과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근로자 간에 식판을 던지며 싸움이 벌어졌다. 이 사건 뒤 한국인 임직원들은 금식 기간 중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모두 합숙소에서 비상 대기하며 급식을 돕고 있다.

올해 라마단 사흘째인 26일 오후 4시50분(현지시간), 걸려온 전화를 받은 건설현장 총책임자인 김종덕(58) 전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아직 빵이 도착하지 않았다고?"

김 전무는 현지인 관리책임자에게 긴급히 상황 파악을 지시한 뒤 근로자들의 합숙소로 달려갔다. 이날 저녁식사는 오후 5시48분 시작하기로 돼 있었다. 일몰 시간에 맞춰 '아잔(예배를 알리는 외침)'이 울리면 근로자들이 일제히 식사를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늦어도 오후 5시엔 배식을 시작해야 하는데, 10분 전까지 빵이 도착하지 않았다니 낭패였다. 김 전무가 헐레벌떡 합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지서구(49) 관리부장이 빵을 실은 트럭이 막 현장에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한숨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일출 시간인 오전 4시18분부터 일몰까지 13시간22분 동안 물도 못 마시고 일한 사람들입니다. 만약 식사가 늦으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릅니다." 엄상은(38) 과장은 말했다. 회사 측은 배식을 원활히 하기 위해 10개의 배식대를 만들고 20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야외 텐트식당도 마련했다. 나머지 1000여 명은 인근 두 곳의 식당에서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한다.

저녁식사를 차질 없이 준비하려면 오후 2시에 취사를 시작해 4시30분까지는 끝내야 한다. 이를 위해 회사 측은 라마단 기간에는 주방 인력을 평소의 두 배인 60여 명으로 늘린다. 점심을 거르고 일한 근로자들을 위해 별식도 준비해야 한다. 한국 직원들이 현지 문화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근로자들을 배려하는 것은 공사 규모가 워낙 커 인력 관리가 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카이로 시내에서 35㎞ 떨어진 허허벌판 카타미야 사막에서 진행되고 있는 AUC 신축공사는 30만 평의 대지에 47개 동의 건물을 짓는 대형 공사다.

현장의 한국인들은 현지 근로자들의 식사가 끝나야 비로소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이들이 사막 현장을 빠져나와 카이로 시내의 숙소로 돌아가는 시간은 오후 10시. 라마단의 시작을 알리는 초승달이 보름을 지나 그믐달로 사라져야 '급식 프로젝트'는 끝난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 라마단=음력인 이슬람력에서 9월을 가리키는 말로, 아랍어로 '타는 듯한 더위와 메마름'이란 뜻이다. 무슬림(이슬람 신도)들은 라마단 기간 중 일출부터 일몰까지 음식은 물론 물.담배도 입에 대지않는 등 철저히 금식한다. 이슬람 창시자 마호메트가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알라의 첫 계시를 받은 달을 기념해 금식성월(禁食聖月)로 정한 것이 시초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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