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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분양제, 집값 낮출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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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근 서울시 산하 SH공사가 은평 뉴타운 지구에서 주변 시세보다 높은 분양가를 책정하자 집값 안정에 앞장서야 할 서울시가 오히려 집값 상승을 부채질한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판교 신도시의 높은 분양가 때문에 내집 마련의 꿈을 접어야 했던 서민들로서는 "서울시, 너마저"라는 깊은 탄식과 함께 크나큰 허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기업들의 담합 행위를 엄격히 규제하는 등 대부분의 시장에서 약자인 소비자를 보호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독 분양주택 시장에서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이처럼 분양주택 시장이 다른 시장과 달리 시장경제의 원리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것은 공급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선분양제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분양제는 첫째, 소비자가 계약금과 중도금을 사전에 지불하기 때문에 입주 후에 발생하는 각종 피해를 보상받는 데 극히 제한적이고 둘째, 선분양을 끝낸 주택업체가 이윤 극대화를 위한 비용 절감에 매달릴 경우 부실 시공이 우려되며 셋째, 주택업체가 부도날 경우 그 피해의 상당 부분을 소비자가 떠안아야 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지엽적인 문제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선분양제가 아파트 고분양가의 주범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얘기는 달라진다.

보통 분양 아파트의 공급은 주택시장이 호경기일 때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 입주는 2~3년 뒤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선분양제는 주택가격 안정보다는 오히려 주택경기 과열을 부추기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수도권처럼 아파트 청약 대기자가 줄 서 있는 곳에서는 주택업체는 마음 놓고 분양가를 올리고, 이는 다시 심리적 요인에 의해 주변 시세를 자극한다. 이로 인해 투기적 수요가 가세하면서 청약 수요가 늘어나고 다시 분양가가 상승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만약 후분양제가 시행된다면 주택업체는 착공 시점보다는 2~3년 뒤 준공 시점의 주택경기에 맞춰 아파트를 분양하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후분양제는 준공 시점의 주택경기가 호경기일 때 입주 물량이 증가하므로 주변 시세를 안정시키고, 반대로 불경기일 때 입주 물량이 감소하므로 주택경기 침체의 장기화를 막는 효과가 있다.

일반적으로 기업들은 물건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면 그만큼 금융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에 가격을 낮춰서라도 적정 수준의 재고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반면 미분양으로 재고가 증가할 경우 엄청나게 큰 금융비용을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택업체들이 고분양가를 고수하는 것은 금융비용 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자신이 있다는 얘기다. 분양주택 시장이 지금처럼 소비자로부터 무이자로 자금을 조달해 아파트를 짓는 선분양제 대신 비싼 이자를 부담하며 완공 후 판매하는 후분양제로 바뀌면 주택업체들은 미분양 무서운 줄 모른 채 고분양가를 고수하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시에서 추진하는 모든 공공아파트는 80% 공정을 마친 후 분양하겠다"는 후분양제를 선언했다.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만하나 그동안 분양주택 시장의 정상화를 위해 후분양제 도입이 선결과제라고 줄기차게 주장해 왔던 필자로서는 왠지 꺼림칙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강남을 능가하는 아파트를 짓는다면서 최고급 마감재와 지나치게 낮은 용적률을 적용하고 높은 토지 보상비를 이미 지불한 서울시가 후분양제를 도입한다고 은평 뉴타운 분양가를 낮추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후분양제가 주택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려면 공공과 민간 전반에 걸쳐 동시에, 그리고 단계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은평 뉴타운 분양가가 더 이상 낮아지지 못하는 것 때문에 혹시나 1~2년 뒤 후분양제 무용론이 대두할까 걱정이다.

<내일은 후분양제의 문제점에 관한 건국대 손재영 교수의 글이 실립니다.>

임덕호 한양대 경상대학장.부동산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