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중심주의 논란 계속 될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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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대법원장이 26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을 방문해 직원들에게 '검찰·변호사 비하성 발언'과 관련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뉴시스]

이용훈(64) 대법원장은 26일 '검찰.변호사에 대한 비하성 발언'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면서도 공판중심주의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공판중심주의가 뭐냐고 묻더라"며 "이번에 재판의 주체는 판사라는 게 국민에게 확실하게 각인된 것 같다. 법원을 위해 크게 한 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강조했다. 사회적 논란에 대해선 "재판 방향과 원칙에서 조금도 잘못됐다는 생각이 안 든다"고 말했다.

◆ 원고 없이 50분간 열변=이날 오전 10시부터 서울고법.중앙지법을 순시한 이 대법원장은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지만 "내가 갑자기 유명해졌다"며 긴장된 모습을 보였다. 단상에 오른 이 대법원장은 오후 4시부터 원고 없이 50분간 법원 관계자들에게 말을 쏟아냈다.

이 대법원장은 "개인으로서는 이만저만 상처입은 게 아니다. 가슴에 응어리가 질 정도로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며 최근의 심경을 토로했다. 하지만 훈시 내내 '사과'나 '유감'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다.

반면 공판중심주의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설명하고 판사들을 독려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공판중심주의 확대는 시기상조"라는 법원 내 반발을 의식한 듯 "(공판중심주의를 담은)형사소송법이 1955년에 개정됐다. 아직 안 되고 있는데 무슨 시간이 더 필요한가"라고 반문했다.

검찰이 25일 증거분리제출제도를 전면 시행하겠다고 밝힌 것과 관련, 그는 "내가 (과거에) 증거를 분리해 제출하라 했다"며 "그동안은 수사 기록에 없는, 증거능력 없는 수사동향보고서를 통해 법관이 심증을 갖고 재판해 왔다"고 비판했다. 민사재판에는 수사기록 제출 요청이 있더라도 사실상 이에 응하지 않겠다는 검찰의 결정에 대해서도 "잘된 일이다. 역시 검찰은 지혜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 "민사재판에서 구술주의가 정착되려면 여러분이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 "사과보다는 해명"=검찰은 정상명 검찰총장이 논란이 된 대법원장의 발언에 거듭 유감을 표명했기 때문에 파문 확산을 자제하고 있다. 그러나 일선 검사들 사이에서는 '사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대검의 한 간부는 "사과라기보다 자신의 발언이 타당했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서울중앙지검의 형사부 검사는 "검찰과 변호사는 법원의 들러리나 서라는 법원 우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변호사들의 반응도 싸늘한 편이다. 대한변호사협회는 "변호사를 사기집단으로 몰아붙인 점에 대해 명예훼손 소송을 할지 계속 검토한다"고 밝혀 파문의 여진이 계속될 소지는 남겼다. 이날 상임이사회에 참석한 한 변호사는 "대법원장의 인격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며 "변협이 마치 비효율적인 논란을 확대하는 것처럼 비춰질까봐 일단 사과를 수용했다"고 전했다.

◆ 공판중심주의 논란은 계속=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공판중심주의 재판의 큰 그림에는 찬성하지만 현실적으로 판사의 수나 재판정의 수가 대폭 늘어나지 않는 이상 업무 부담이 너무 크다"고 지적했다. 법원에서는 공판중심주의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판사의 수가 현재의 4배인 8000명선이 돼야 한다고 예상한다. 대법원 관계자는 "판사 1명을 늘리는 데 연간 1억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검찰은 공판중심주의에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법정에서의 진술 번복 및 위증이 크게 증가할 것을 우려한다. 이 때문에 위증죄에 대한 처벌 강화와 함께 '플리바기닝'(유죄협상제도)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국재 대한변협 인권이사는 "현재는 사건당 수임료를 받지만 공판중심주의가 되면 시간당 받는 방식으로 바뀔 것"이라며 "엄청난 재판 비용이 국민에게 전가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문병주 기자

◆ 공판중심주의=법정에서 증인들의 진술과 피고인 신문을 통해 유.무죄를 판단하자는 '듣는 재판'형태의 재판 진행이다. 형사소송법에는 공소장일본주의(公訴狀一本主義:법관이 재판에 선입관 없이 임하도록 하기 위해 검사는 기소할 때 공소장 하나만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는 취지)가 규정돼 있어 우리나라 역시 이 원칙이 확립돼 있지만 실제 이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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