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잣거리 풍경] 제갈량 닮아가는 盧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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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명필(名筆)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 "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의 '서툰 붓놀림'을 언론과 야당 탓으로 돌려왔다. 급기야는 재신임 카드를 들고 나와 '못 해먹겠으니 배 째라'는 식의 자해(自害) 위협선언을 불쑥 던져 놓았다.

정치 9단이라는 3金의 대응이 이채롭다. "재신임은 독재자들이나 하는 수법"(김영삼)에서부터 "탄핵해야 한다"(김종필), 그리고 '묵묵부답'(김대중)까지 이들 구 정치인의 반응은 그들 나름대로의 의미와 색깔을 지니고 있다.

국민들은 이제 역사의 뒤 안에 있어야 할 김영삼 전 대통령 특유의 독설과 '안방 차지의 귀재'라는 김종필 자민련총재, 그리고 스스로 고른 '적자(嫡子)' 때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재출연(出演)을 통해 한국 정치의 단면을 보게 된다.

제갈공명은 그의 신출귀몰한 지모에도 불구하고 결국 위나라의 사마중달에게 패한 인물이다. 그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현세(現世)로 돌려 청와대 수석으로 환생(還生)한다면 노무현 대통령에게 무슨 충고를 했을까. 아마 스스로 실패한 이유를 되돌아보고 자기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조언했을지 모른다.

유비가 죽고 제갈공명 혼자 촉을 다스릴 때다. 중원에서 제갈량과 대치하고 있던 위나라의 사마중달은 싸움을 걸어오는 제갈공명의 꾀에 넘어가지 않았다. 안달이 난 제갈공명이 사마중달에게 "너는 겁쟁이"라는 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시체를 넣는 관과 여자들이 입는 상복을 보냈다.

자존심이 상해 화가 날 법도 했지만 인내심이 강한 사마중달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관을 가져온 사신에게 공명의 근황을 물었다. 사신은 "승상께서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시고 밤이 늦어야 잠자리에 드십니다. 또 스무 대 이상 매를 때릴 일은 모두 몸소 맡아 하십니다"라고 답했다. 중달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탈진한 공명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식사와 잠 모두가 부족하다"는 고사성어 식소사번(食少事煩)은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국민들은 눈 다래끼가 난 노무현 대통령의 피곤한 모습에서 탈진한 제갈공명의 모습을 겹쳐보게 된다. 특히 나라 살림에는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언론잡기와 재벌 흔들기에 혼이 빠져 있는 모습에서 스무 대 이상 때릴 일이 있으면 몸소 매를 들었던 제갈량이 환생한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국민들은 그 종국이 패망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함께 읽고 있는지 모른다. 출사표를 던지고 중원에서의 경제전쟁에 몰두해야 할 盧대통령이 스스로 국내 문제에 사로잡혀 매몰돼 있다는 것은 불행이자 국가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양봉진 세종대 경영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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