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합리적 보수 늘리는 것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혁명이 아니라면, 개혁이란 합리적 보수의 숫자를 늘려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파리에 체류 중인 한국의 대표적 진보 성향 작가인 황석영씨는 보수와 진보가 사사건건 맞붙는 국내 현실에 대해 이 같은 처방을 내렸다. 황씨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진보적 관점에서 통렬하게 지적해온 지식인의 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온 '합리적 보수론'은 그래서 더욱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는 "중도적인 사람이 많이 늘어나야 과거 독재시절의 상흔을 치유하고 튼실한 민주사회를 다질 수 있다"며 자신의 생각을 재차 확인해 주었다.

인터뷰는 19일 오후 황씨가 사는 파리 센 강변 아파트에서 이뤄졌다. 중앙일보 창간 41주년 기념 '황석영에게 듣는다-2006년 대한민국 어디로 가나'를 위해서다. 황씨는 자신의 관심이 이념문제보다는 사람답게 사는 길에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념대립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상식이 저절로 이끌어 가는 사회가 편안한 사회"라고 말했고, '복지 천국'인 스웨덴 좌파 정권의 패배에 대해서는 "과거와 같은 이념문제라기보다는 불안한 이행기 속에서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으로 해석했다.

그는 "좌우는 이제 하나의 기능이 되어야 한다"며 "'지금은 이념의 시대가 아니라 프로페셔널의 시대'라고 하는 소리도 서로의 사회적 기능을 인정하자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황씨는 "현 (노무현) 정권과 여당을 좌파라고 한다면 웃을 것"이라며 "현 정권의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은 보수정당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현 정권의 대북 정책에 대해서는 "자주 운운하며 큰소리는 쳤지만 역시 현실은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라며 "대미 정책과 함께 대북 문제는 대체로 일관성이 없었다"고 비판했다. 황씨는 또 "일방적인 반미나 친미는 지혜로운 행동이 아닌 것 같다"며 "깊은 속내를 굳게 다지면서 작은 나라의 역할에 천착해서 강대국 틈에서 조정자의 역할을 해내야 할 것"이라고 방향을 제시했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는 "정책의 근본이 잘못됨에 따라 이쪽저쪽 모두의 민심이 떠났다"고 진단했다. 그는 "내가 2년 반 전에 판 시골집이 스무 배로 뛰었더라"며 "나야 '글이나 열심히 쓰면서 먹고살아라'는 하늘의 뜻으로 알고 한숨 한 번 쉬고 말았지만, 이렇게 폭등하는 부동산을 보고 누가 열심히 일하겠느냐"고 개탄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과 관련, "경륜은 부족할지 모르지만 순수하다"면서도 "너무 많은 부분을 설거지하려고 한 것은 과욕"이라고 지적했다.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문제에 대해선 "전작권은 우리가 가져야 마땅하지만, 생길 때에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있지 않다"며 "주권을 가진 나라의 시민으로서 전쟁 지휘권을 외국이 갖고 있다는 것은 수치이기 이전에 생존권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의도에 대해서는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은 예전처럼 바다쪽 세력에 기대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고 하고, 중국은 자본주의의 장점을 받아들여 옛날 한(漢)제국 이래의 중화 세상을 꿈꾸고 있다"고 지적했다.

황씨는 지난해 자신이 노벨문학상 최종심에까지 올랐다는 사실을 독일 문화계 인사들에게서 들었다"면서도 "노벨상의 가치는 인정하지만 나를 보고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큰 작가'라고 남들이 떠드는 것은 촌스러워서 싫어한다"고 말했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창간 41주년 기념 '이문열에게 듣는다'는 9월 18일자에 실렸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