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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색깔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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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서양에서 노랑은 배신의 색이다.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옷 색깔이 노랑이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에선 종교재판에 회부되는 이단자에게 노란 망토를 입혔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나타내는 표시로 노란 다윗의 별을 사용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노랑은 황제의 색깔이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황궁 생활을 노란색의 연속으로 기억했다. "지붕 기와도 노랑이고, 가마도 노랑이었다. 방석도 노랑이었고, 내 옷과 허리띠 역시 노랑이었다. 그릇과 잔도 노랑이었고, 방에 드리운 커튼 또한 노랑이었다. 노랑은 내가 유일한 존재이며, '하늘의 본성'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갖게 했다." ('색의 유혹', 에바 헬러 지음)

19일 태국 군부가 쿠데타로 탁신 총리를 축출했다. 군인들 소총엔 노란 리본이 달렸다. 태국에서 노랑은 국왕의 상징이다. 지난해 10월부터는 반(反)탁신 운동의 상징 색으로도 쓰이고 있다. 언론인 손디가 주도했다. 그는 탁신이 부패와 권력 남용으로 국왕에게 불충했다며 "탁신 타도와 국왕 보호를 위해 노란 옷을 입자"고 호소했다. 이후 방콕엔 노랑이 넘실댔다.

빨강은 공격적이다. 복서의 글러브는 빨간색이다. 미국 풋볼의 라커 룸 또한 빨갛게 칠해진 게 많다. 투지를 다지기 위해서다. 로마의 검투사는 죽어가는 적의 상처에서 흐르는 붉은 피를 마셨다. 적의 힘을 옮겨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중국에서 빨강은 행운의 색이다. 음식점 치장은 물론 컴퓨터 바탕색도 빨갛게 물들인다. 아이들에게 빨간 옷을 입히는 건 행운을 얻기 위해서다. 축의금 봉투도 빨간색이다.

9월 대만의 타이베이(臺北)에는 '빨강 물결'이 등장했다. 천수이볜(陳水扁) 대만 총통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다. 빨간 옷을 입은 이들은 천의 친인척 비리를 규탄하며 정권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반(反)천수이볜의 상징 색으로 빨강을 제안한 사람은 '반부패 정좌(靜坐) 운동' 본부의 대변인 판커친(範可欽)이다. 그에 따르면 천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건 '빨간색'과 '국제 여론'이다. 이 때문에 "빨간 옷을 입고 시위를 벌여 국제적 주목을 받자"는 것이다. 천수이볜 퇴진 운동은 한 달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이젠 그루지야의 '장미 혁명',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에 이어 아시아에도 색깔 혁명 바람이 거세다. 그 바람이 어째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다.

유상철 국제부문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