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 발언에 검·변 격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검찰과 변호사들이 이용훈(64.사진) 대법원장의 최근 초도순시 발언에 대해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특히 정상명 검찰총장과 대한변호사협회는 21일 이 대법원장의 발언에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할 계획이어서 파문이 확산될 전망이다.

대검찰청은 20일 이 대법원장이 광주(13일).대구(18일).대전(19일) 지역 법원을 방문하면서 "검사가 작성한 수사기록을 던져버려라"라는 등 검찰수사를 문제 삼은 것과 관련, 임승관 차장 주재로 긴급간부회의를 갖고 대응책을 논의했다. 임채진 서울중앙지검장도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는 ▶검사실에서 작성된 조서는 밀실에서 작성됐다(광주.대전) ▶검사가 작성한 수사기록을 던져버려야 한다(대전) ▶공판정에서 검사는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수사기록만 던져놓는다(대전) 등 세 구절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 총장은 회의 결과를 보고받고는 "이 대법원장의 발언은 부적절하다"며 "조직의 책임자로서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표명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에 참석한 한 간부는 "'부적절한 발언이다'라는 말은 상당히 순화된 표현일 정도였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대한변호사협회도 이 대법원장이 13일 광주 고.지법을 방문한 자리에서 "변호사들이 만든 서류는 대개 사람을 속여 먹으려고 말로 장난치는 것이 대부분이다"라고 말한 것과 관련해 21일 긴급 상임이사회를 열고 대응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대한변협 관계자는 "법원이 '법조 3륜'의 몸통이고 나머지는 곁가지인 것처럼 비하한 대법원장의 발언은 묵과할 수 없다"고 밝혔다.

◆ 격앙된 검찰과 변호사 단체=검찰은 "이 대법원장이 검찰을 철저히 무시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대법원장이 취임 1주년(9월 25일)을 앞두고 일선 법원을 순시하면서 법관들에게 공판중심주의와 구술변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한 발언이지만 검찰을 철저히 비하하는 수준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검찰은 언론에 보도된 이 대법원장의 발언 내용과는 별도로 자체적으로 실제 그 같은 말이 있었는지를 파악한 것으로 전해졌다.

강찬우 대검 공보관은 이날 회의와 관련해 "이 대법원장의 발언이 검찰의 기능과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어서 이에 대한 의견을 모으고 검찰이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할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고 설명했다.

일부 일선 검사들은 이 대법원장을 성토하는 발언도 했다.

대검의 한 간부는 "이 대법원장의 직설적이고 도발적인 발언은 오히려 법원의 품격을 떨어뜨릴 것"이라며 "상스러운 말을 하면 마치 개혁적으로 보이는 시대적 분위기도 문제"라고 말했다.

이 대법원장의 정치적 성향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었다. 서울고검의 부장급 검사는 "이 대법원장이 현 정권과 코드를 맞추고 있다는 일각의 지적처럼 검찰을 견제하려는 부정적인 시각이 엿보인다"며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야 할 사법부 수장으로서 매우 부적절한 처신인 것 같다"고 말했다.

조관행 전 고법부장판사에 대한 검찰 수사에 불만을 품고 의도적으로 검찰을 흠집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최근 대검 중수부의 론스타 수사나 서울중앙지검의 사행성 성인오락게임 비리 수사와 관련해 법원이 주요 피의자에 대한 체포.압수.구속영장을 잇따라 기각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대한변협의 한 관계자는 "이 대법원장도 변호사를 하며 수임료를 많이 받지 않았느냐"라며 "열린 사법을 하겠다는 것과 변호사를 비하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 변호사는 "이 대법원장의 발언은 법조계를 편 가르기 하는 것"이라며 "결국 법원과 검찰, 변호사계 모두에 대한 국민의 불신만 초래할 것"이라고 밝혔다.

◆ 진화에 나선 법원=대법원 변현철 공보관은 변호사 비하 발언 논란과 관련, "이 대법원장이 당시 '일부 변호사들이 만든 서류가 소송을 유리하게 하려고 법원을 속이고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경향도 있다'라고 말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는 법관이 사건 당사자의 진술내용을 통해 사건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 '수사기록을 던져버려라'라는 발언에 대해서도 "민사사건을 심리하는 판사들이 관련 형사사건이 있을 경우 검찰의 형사사건 기록에 의존해 재판하는 관행을 바로잡으라는 취지"라고 밝혔다.

김종문.백일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