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칼럼

세콰이어 숲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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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 캘리포니아의 세콰이어 국립공원에는 가끔 원인 모를 산불이 난다. 수령 800년 이상의 거대한 세콰이어 나무들이 빽빽한 숲일수록 불이 자주 났다. 과학자들은 늙은 세콰이어 나무의 열매가 휘발성 강한 물질을 내뿜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불 탄 자리에 어린 세콰이어들이 돋아나 숲의 순환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래서 세콰이어 거목이 빼곡한 숲은 보기엔 좋지만 수명이 다해가는 징조라고 한다. 거목들 사이사이로 싱싱한 젊은 세콰이어들이 자라는 숲이 생명력이 훨씬 길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어울려 숲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다. 자연 생태계의 오묘함이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 판도를 짚어보면 늙은 세콰이어 숲이 떠오른다. 삼성.현대차 등 대기업들은 세계시장을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키나 부피에서 거목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런 대기업들 사이로, 건강한 생태계라면 당연히 눈에 띄어야할 싱싱한 중견기업은 찾기가 어렵다. 지난 10년간 중소기업이 종업원 300명 이상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확률은 0.13%에 불과했다(KDI 조사). 국내 매출 200대 기업 가운데 1980년대 이후 창업한 곳은 웅진코웨이가 유일할 정도다. 우리 기업 생태계가 모래시계형으로 굳어진 것이다. 허리가 가는 구조로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

이런 기형적 생태계는 우선 정책 실패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중소기업은 언제나 지원과 보호의 대상이고 대기업은 규제 위주로 다루어 왔다. 종업원 300명 아래나 매출액 1000억원 미만(제조업)의 중소기업에는 각종 세액공제와 세금감면 혜택이 주어지고, 금융기관들도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었다. 이 기준을 넘어서면 수많은 혜택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리고 숱한 규제가 씌워진다. 이러니 잘나가는 중소기업조차 성장을 꺼리는 판이다. 중소기업 기본법의 기준에 맞춰 일부러 회사를 쪼개는 편법까지 기승을 부린다. 어른 되기를 꺼리는 '피터팬 증후군'이 따로 없다.

이런 기업의 경영자들은 소극적이고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이미 중소기업을 졸업한 회사들 가운데 58%가 도로 중소기업으로 복귀하길 희망했다(대한상의 조사). 기업을 홍보하기도 무섭다. 코스닥 등록기업의 36%가 "기업설명회(IR)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응답했다. 일부는 홍보 기피를 넘어 두려움마저 느끼는 수준이다. "회사가 좀 된다고 소문나면 곧바로 대기업들이 단가를 후려치고 국세청 직원들만 뻔질나게 들락거린다…." 중견기업 경영자들의 하소연이다.

최근 피터팬 증후군 치유 노력들이 고개를 드는 것은 다행스럽다. 우선 국회에서 발의한 '중견기업 지원법'이 눈길을 끈다. 규제 완화를 통해 중소기업→중견기업→대기업으로 눈치 안 보고 자라도록 길을 터주기 위한 것이다. 다만 상정된 지 1년이 넘도록 이 법안의 심의조차 미루는 것은 유감이다. 신임 김성호 법무부 장관도 인터뷰에서 "경제의 활력을 찾도록 법률적 지원을 하겠다"며 "기업을 지원하는 데 법률적 장애가 있는지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역시 퍼주기 식 중소기업 지원정책을 재검토할 움직임이다. 기업 규모를 따지기보다 성장 가능성이 큰 혁신기업 쪽으로 선택과 집중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낌새를 눈치챘는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때마침 이름을 바꾸었다. 가운데의 협동조합을 빼버렸다. 서로 뭉쳐 정부의 단체수의계약에만 목을 매다 보니 혁신은커녕 울타리 안에 안주했다는 자책의 몸부림이 느껴진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는 숱한 대기업의 붕괴를 목격했다. 그러나 중견기업들이 쑥쑥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본 지는 너무 오래됐다. 이제 과도한 중소기업 보호와 지나친 대기업 규제는 대폭 손질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중견기업들이 혁신을 통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쪽에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국가경쟁력 제고나 일자리 창출에도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세콰이어의 교훈을 밑거름 삼아 기업 생태계가 활력을 되찾고 건강한 숲으로 변모했으면 한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