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시험 보라니… " 한국 여걸들 화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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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브리티시 여자오픈이 끝난 뒤 한국 여자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얘기 꽃을 피웠다. 왼쪽부터 박세리(CJ).정일미(기가골프).이지영(하이마트). 리덤(영국)=성호준 기자

미국 LPGA 투어에서 뛰고 있는 한국 선수들이 한데 모였다. 폭탄주를 돌리며 함께 외쳤다.

"이젠 뭉치자."

국내 팬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동안 LPGA 무대에 나가 있는 한국의 프로골퍼들은 하나가 아니었다. 개인종목이라는 특성상 동반자라기보다는 경쟁자였고 바쁜 투어 일정과 훈련, 서로 다른 경기 시각 때문에 함께할 시간이 모자라기도 했다.

미국 진출 초기, 선수들은 한인 교민들이 초대한 식사에 함께 가서 어울리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 선수들은 우애를 다졌다.

그러나 교민회 일부 간부들이 "나도 왕년에 한국에서 한 가닥 하던 사람"이라는 공치사로 시간을 오래 끄는 바람에 그런 자리는 사라졌다. 이후 한국 선수가 많아지고 경쟁이 심해지면서 한데 모이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한국 선수들이 뭉치고 있다. 영어 스트레스 때문이다. LPGA는 한국 선수들이 영어를 못해 프로암에서 스폰서들과 말도 하지 않으며, 대회 중 표정이 너무 없어 시청률이 떨어진다고 스트레스를 줬다. 영어 시험을 봐야겠다는 얘기까지 공공연히 들렸다.

선수 수가 늘어났고, 시즌 9승이나 차지해 LPGA 주류로 성장한 한국 선수에 대한 은근한 견제이기도 했다. 급기야 LPGA 투어 커미셔너인 캐롤린 비벤스가 한국 선수들에게 저녁식사를 사겠다고 모아놓고 "영어를 배우라"고 채근하기도 했다.

그러자 한국 선수 중 왕언니인 정일미(34.기가골프)가 나섰다. 비벤스 앞에서 정일미는 "자꾸 그렇게 말하지 말라. 우리도 하고 싶다. 그러나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이 그리 쉬운 줄 아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정일미는 "얘기하려거든 잘 못하는 한국 선수를 찍어서 얘기해라. 한국 선수 전체를 매도하지 마라"고도 항의했다. 이후 LPGA에서는 한국 선수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고 한다. 영어 시험 이야기도 쑥 들어갔다.

한 선수는 "일미 언니의 큰 소리에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 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일미가 한국 선수 중 리더로 자리 잡게 됐다.

8월 영국에서 열린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는 한국프로골프협회 김미회 전무가 협회 이사를 지냈던 정일미와 함께 한국 선수를 모아 놓고 회포를 푸는 자리도 마련했다. 그러자 브리티시 오픈에 나온 한국 선수 중 둘째 언니인 박세리(CJ)가 나서 폭탄주를 돌리며 단합을 호소하기도 했다. 선수들은 다들 "한국 대회에도 자주 나가고 미국에서도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함께 발전하자"고 입을 모았다.

성호준 기자

*** 한국 선수들의 맏언니 정일미

"영어 못한다고 무시하기에 괄괄한 제가 한마디 했어요"

'맏언니' 정일미(34.기가골프) 선수의 말을 직접 들어봤다.

-LPGA에서 한국 선수의 의견을 대변한다는데.

"내가 제일 언니고 성격도 괄괄한 편이어서 나섰어요. 자꾸 영어를 강요하는데 골프대회지 영어 경시대회는 아니잖아요. 물론 미국에서 경기를 하니까 미국 문화와 영어를 잘해야겠고, 우리도 영어를 잘하고 싶지만 그런 걸로 자꾸 스트레스 받으면 성적에도 영향을 줘요."

-영어는 잘해요?

"잘 못하지만 우승하면 영어로 인터뷰 할 정도는 됩니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해 보고 싶은 거 다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에요. 우승도 하고 좀 더 좋은 성적을 낸 후에 돌아갈게요."

-요즘 성적이 좋은데.

"이제 여유가 생겼어요. 넓게 보고, 길게 보고 이번에 보기 하면 다음 홀에서 버디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여유있게 경기하니 잘 되는 것 같아요."

-미국 진출 첫 해에 빨래도 못 할 정도로 바빴다는데 요즘은 좀 나아졌나요.

"처음 와서는 연습하고 여행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 여행가방에 옷을 쓸어 담아 넣어 다니기도 했어요. 연습 잘하고 잘 먹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지저분하게 구겨진 옷 입고 좋은 샷을 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지금은 옷도 잘 다려 입어요."

-벌써 서른 네 살이 됐네요.

"눈가에 주름이 많아졌어요. 너무 많이 웃어서 그런 거 같아요. 웃음을 줄여야 하나, 보톡스는 부작용이 없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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