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한국의 브라질化'를 막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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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세계의 브라질화'라는 개념이 있다. 브라질 사회가 극심한 빈부격차와 국민 다수가 위험스럽고 불안정한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음을 빗댄 말이다. 정보화.세계화 시대에 잘 사는 소수와 소외된 다수로 양극화되는 경향을 가리켜 '2대 8의 사회'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한국 사회도 이런 추세에서 예외는 아닌 듯싶다. 한국개발연구원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소득 불평등도와 빈곤율이 급속히 상승했다. 중산층이 주저앉고 있고, 절대적.상대적 빈곤층이 인구의 4분의 1에 달한다. 우리 사회에서 최상위 20% 정도의 인구는 잘 나가고 있으나, 그 이하의 계층들은 갈수록 살기가 빡빡해지고 있다. 특히 상층으로 이동하기는 더욱 어려워지는 반면 중간층에서 중.하층으로 또는 중.하층에서 빈곤층으로 주저앉는 경향은 강화되고 있다.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직의 비중은 계속 커져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정보화 시대의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 2대 8의 사회는 이미 진행된 미래가 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세대별로 관찰할 때 더 뚜렷해진다. 각 세대에서 노동시장의 구조적 불균형이 발견된다. 청년 세대를 보라. '자유의 아이들'인 이들은 높아진 욕망을 충족시켜줄 기회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 그 결과 3D 업종은 일손을 못 구하지만, 9급 공무원 시험에는 대졸자들로만 수백대 1의 경쟁을 치르는 상황이 벌어진다. 사오십대는 '사오정'과 '오륙도'라는 패러디에 상처받고 있다. 일하고 싶은 '젊은 노인'들은 열악한 주변적 일자리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세대별로 안정된 직업과 삶에 대한 기대는 무력해지고 있다.

한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노동력을 적절히 활용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적정한 근로소득이 다수에게 보장될 때 내수 경제도 진작될 수 있다.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외환위기보다 더 장사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잠시 신용카드를 풀어 반짝 내수 경기를 만들어냈으나 그것은 거품이었을 뿐이다. 신용불량자 3백만명이 그것을 증명한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빈곤층이 늘어나는데 '상가 경기'가 좋아지길 기대하는 것은 '먹지 못할 제사에 절만 죽도록 하는 격'이다.

문제는 2대 8의 사회를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데 있다. '승자가 모든 것을 먹는 (Winner takes all) ' 경제에서 그것은 불가피한 추세로 다가온다. 고성장 체제를 유지하더라도, 기업은 '더 적고 더 유연한 인력'을 요구하므로 안정적인 일자리 시장은 그리 넓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경제 논리로만 2대 8의 사회를 넘으려는 기획은 순진한 것이다.

'정치'가 개입할 지점이 바로 여기다. 각 주체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위해 선의를 발휘하게 하는 촉매 역할은 정치 외에는 할 수가 없다. 노동시장의 구조적 불균형은 단기적인 대증요법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청년실업으로 들썩이니까 실효도 없는 단기대책을 발표하는 조급함으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2대 8의 사회가 좀 긴 안목에서 보면 경제의 발목도 잡고 '선진국 진입'도 가로막는 것임을 경제 사회의 각 주체들이 알도록 해야 한다.

기업이 인력을 조정할 때 한국 경제의 장기발전의 관점에서 '사회적 책임'을 고려하도록 경제계의 전략적 행위가 이뤄져야 하고, 정부는 노동.교육.복지.여성.문화 정책을 연동해 '일의 기회와 자아실현'을 지원하게끔 '사회적 책임'을 맡아야 한다. 다양한 공공근로섹터를 조성해 '노동'과 '사회봉사'를 겸한 일자리들을 만드는 데 시민들은 사회적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각 주체가 장기적 비전에 입각한 '사회 협약'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정치가 요구되는 것이다. '비전과 통합의 정치'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한국의 브라질화'를 막고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것은 이런 정치 없이는 불가능하다.

박형준 동아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