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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 "쉬리의 영광 다시 보여주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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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의 강제규(41)감독이 5년 만에 메기폰을 잡은 신작 '태극기 휘날리며'가 촬영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태극기…'는 오는 28일 촬영을 마치고 내년 1월16일 개봉한다.

이 영화는 사상 최대 제작비인 1백30억원이 들어간 데다 6.25를 소재로 한 전쟁영화라는 점 등으로 벌써부터 '제2의 쉬리'가 될 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장면들

1999년 설에 개봉했던 '쉬리'는 서울 관객 2백50여만명, 전국 6백만명을 모으며 당시 '타이타닉'을 제치고 흥행 신기록을 세웠을 뿐 아니라 '유사 할리우드 전략으로 할리우드를 이겼다'는 평가를 받으며 한국영화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경남 산청에서 마무리 작업에 한창인 강감독을 전화로 만났다. 산청에는 '태극기…' 촬영을 위해 15억원을 들여 만든 세트장이 있다.

-6.25를 택한 이유는.

"'쉬리'때도 그랬지만 세계시장에 먹힐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 결과 장르적으로는 액션물을 누구나 별 저항없이 받아들인다고 보았다. 액션에는 주먹다짐 액션이 있고 총격전이 있지만 주먹다짐은 홍콩영화가 너무 많이 써먹었다. 반면 총격전이나 전쟁영화는 우리도 경쟁력이 있다. 게다가 6.25는 한국이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된 전쟁이고 16개국이 참전한 세계전쟁의 축소판이었다. 따라서 다른 나라 관객과 연대감이나 공감을 가장 잘 형성할 수 있는 포인트가 된다고 판단했다."

-'태극기…'는 할리우드식 전쟁영화를 지향하나.

"흔히 전쟁영화하면 전투를 다루거나, 전사의 영웅담을 그리거나, 전쟁이 초래한 참상의 한 단면을 다룬다. '태극기…'에도 이런 요소들이 기본적으로는 담겨 있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지속돼 한 인간의 남은 삶을 지배한다는 점이 내 영화에서는 더욱 강조된다. 용산 전쟁기념관에 가면 '형제의 상(像)'이 있다. 형과 동생이 국군과 인민군으로 갈라져서 서로 총을 겨눈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태극기…'는 허구적인 드라마지만 6.25가 가진 이런 드라마틱한 사건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우리 시장 크기로 볼 때 순수 제작비 1백30억원은 규모가 너무 큰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자화자찬 같지만 '은행나무''쉬리'를 만들때도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규모의 영화가 어떤 것인 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해외시장까지 고려하면 충분히 승산있는 제작비 규모다. "

-제작비에 해외 자본도 있나.

"없다. 순수 국내 자본이다. 투자하겠다는 외국 자본은 있었다. 그러나 일본 자본은 수익 배분율을 너무 높게 요구해 무산됐고 유럽이나 미국은 보험료 때문에 거절했다. 그 쪽은 영화가 완성되지 못할 때를 대비해 보상받을 수 있는 보험을 드는 모양이다. 그런데 보험료가 전체 제작비의 10%나 됐다. 10억원 이상을 보험료로 지출하면서 투자받을 수는 없어 그만뒀다."

-'쉬리'가 한국영화에 끼친 공은 무엇이라고 보나.

"불과 5년 전이지만 당시 한국영화는 다양성 면에서 문제가 많았다. 돈과 기술이 달리고 시장 규모가 작다 보니 감독과 작가의 상상력이 자꾸 위축됐다. 새로운 걸 시도해 보려해도 "안 돼"라는 답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관객의 눈은 자꾸 높아지는데 한국영화가 구태의연한 것만 보여준다면 발전이 없다. 할리우드를 겁내지 말고 부딪쳐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쉬리'는 이런 한계에 대한 도전이었고 그게 적중했다. 한국영화가 지금 시장 점유율이 50%에 이르게 된 건 '쉬리'이후 다양한 장르 영화가 나왔기 때문이다. 홍콩영화는 액션 장르만 계속하다 망했고, 대만은 아트영화에만 주력해 쇠퇴했고, 일본은 구로사와 아키라 등 전 세대 감독들의 전통에만 의존한 채 새로운 세대의 기호를 따르지 못해 어려움에 처했다. 장르의 다양성이란 그래서 중요하다."

-그러나 '쉬리'가 초래한 부정적인 면도 있다. 제작비 70억~80억원대의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대작)가 양산됐고 거의 모두 흥행에 참패했다. '쉬리'가 한국영화도 할리우드를 이길 수 있다는, 가능하지 않은 환상을 심어줬다는 비판이 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의 실패는 한국영화가 언제가는 한번 겪어야할 시행착오였다. 할리우드만 추종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배운 셈이다. 하지만 그런 시도 자체는 아주 소중한 경험이다. 블록버스터가 한국영화의 갱생을 위한 대안은 절대 아니다. 그건 다양한 장르 중 하나이고, 기호 상품의 하나일 뿐이다. 실패한 블록버스터들은 우리 식의 규모와 볼거리에 대한 고민이 적었다."

-우리식 규모와 볼거리란.

"한국영화는 절대 할리우드처럼 물량 공세를 펼 수 없다. 화려한 영상이란 드라마에 입히는 옷에 불과하다. 결국은 탄탄한 이야기 구조가 승패를 좌우한다. 할리우드가 한 번 웃길 때 우리는 두 번 웃기고, 한 번 울릴 때 두 번 울려서 감동을 배가해야 한다. 머리로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할리우드는 볼거리가 많아 드라마가 좀 허술해도 봐 준다. 한국영화는 어차피 그런 수준에 못 미치는 것 아닌가. 실패한 블록버스터들은 그림(볼거리)에만 몰두했다. 속은 비었는데 옷만 화려하게 입히려고 했다. 껍데기하고만 싸운 것이다."

-'쉬리'의 성공 이후 배급과 극장 진출, 매니지먼트 등으로 사업을 넓혀 '강감독이 무리하게 일을 벌인다'고 말이 많았다. 결국 재미를 보지 못한 셈이 됐는데.

"맞다. 돌이켜보면 그건 개인적으로 마이너스였고 영화계에도 도움이 안 되는 일이었다. 당시 한국영화는 산업적으로 힘차게 뻗어나갈 수 있는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쉬리'로 큰 돈을 만지게 되자 내가 그런 일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 내지 사명감이 생겼다. 결국 실패했다. 너무 욕심을 부렸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많이 반성하고 있다. 그러나 전화위복이 됐다. 만약 그 때 사업이 잘 됐다면 다른 쪽에 더 힘을 쏟아 감독의 길에서 점점 멀어졌을 것이다. 감독이란 늘 스스로 연마하고 느끼고 공부해야 하는 직업이다. 사업이 망한 덕에 그런 시간을 다시 가질 수 있게 됐고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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