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중국 눈치보다 백두산까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여름이 유난히 길고 무더웠기 때문일까. 초가을 아침 바람이 더없이 상큼한 요즘이다. 그러나 신문 1면에 난 사진 한 장이 상쾌한 아침 기분을 잡쳤다. 중국이 내년 1월 창춘(長春)에서 열리는 제6회 겨울아시안게임 성화를 백두산에서 채화하는 사진이었다. 그리스의 올림픽 성화채화처럼 흰색 드레스를 입은 처녀들이 오목거울 반사경으로 채화한 성화를 들고 있었다. 올림픽 채화와 다른 것은 배경이 헤라신전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 천지라는 점이었다. 이 사진은 AP통신을 통해 당연히 전 세계에 그대로 전송됐다. 이를 본 외국인들은 이제 백두산을 중국의 산으로 기억할 것이다.

물론 중국이 자기네 땅에서 하는 일을 우리가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1962년 북한과 중국이 체결한 '중조변계조약'에 따라 천지의 45%는 중국령이기 때문에 국제법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 사진은 우리에게 분명한 도발이다. 이 사진은 중국과 북한 사이에 국경조약이 있건 없건, 백두산정계비의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창바이산(長白山)'은 중국의 산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중국이 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 그 많고 많은 산 중에서 유독 백두산을 골라 이 행사를 치렀을까. 그리고 왜 이를 보란 듯이 전 세계에 공개했을까. 답은 이 사진에 나와 있다. 사진은 나아가 중국 동북공정(東北工程)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북공정의 핵심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 왜곡만이 아니라 현재는 물론 앞으로 있을지 모를 간도 등을 둘러싼 영토분쟁에 대비한 정지작업이라고 봐야 한다. 유사시 북한에 진주해 북한을 명실공히 '동북 4성'으로 장악하려는 속내도 배어 있다. 때마침 한강 이북이 중국 땅이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겨울철에 중국이 압록강 일원에서 대대적인 도강훈련을 실시하는 것도 이런 관측과 무관하지 않다.

이번 사진과 발해사 왜곡, 중국의 겨울올림픽 백두산 유치 움직임 등으로 나라가 소란스럽다. 오랜만에 정치권도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그간 우리의 대응은 너무 안일했다. 2004년 언론과 학계가 강력 항의하자 우리 정부는 마지못해 중국과 역사 왜곡을 중단하자는 신사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헌신짝처럼 팽개치고 오히려 더욱 집요하고 광범위하게 동북공정을 추진했다. 그리고 이제는 '백두산공정'까지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가 적극 대처하기는커녕 중국을 자극하지 말라며 오히려 동북공정을 묵인하고 방조했다. 게다가 동북공정에 학술적으로 대응하던 거의 유일한 기관이던 고구려연구재단마저 2년 만에 해산하고 동북아역사재단에 흡수통합시켰다. 그래 놓고 지난주까지도 "2004년 이후 중국의 역사 왜곡은 없다"고 국회에서 답변했다. 그래서 국민은 분노한다. 고구려 역사와 백두산을 아예 중국에 넘겨주기로 작정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있는가.

북한을 사실상 통제하고 있는 중국의 심기를 건드려 6자회담 등에서 득될 것이 없다는 게 이 정부의 판단인 모양이다. 그러면 우리가 동북공정을 묵인하고, 나아가 협조까지 해 중국이나 북한으로부터 얻어낸 게 무엇인가. 북한의 핵실험 위협과 미사일 발사,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중국의 영토 야욕 이외에 우리가 얻어낸 게 과연 무엇인가.

정부 하는 짓이 이 모양이니 시민들이 나서 1000만 명 서명운동을 벌이는 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정부는 외교부에든, 청와대에든 동북공정 전담팀을 만들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바란다. 달라이 라마는 왜 못 데려오나. 독도 문제나 교과서 왜곡으로 일본에 하던 '자주'의 패기로 중국에 맞서라. 물론 학계도 나름대로 이론적.학문적 '투쟁'에 나서야 한다. 남북이 공동 대응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래야 반만년 역사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을 지킬 수 있다. 이를 방기하는 것은 바로 역사의 죄인이 되는 것이다.

유재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