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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하는 동구|열기의 현장을 가다<25>|인플레 지옥 유고 복부인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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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유고슬라비아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플레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하나다.
유고의 이름난 반체제인사인 사상가 밀로반 질라스씨는 유고의 인플레를 이렇게 설명한다.『유고 경제위기는 심성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 인간성을 파괴하고 없는 것이다.』
질라스씨는 유고 국부 티토 전 대통령의 친구이자 부통령을 지낸 정치 후계자였으나 티토와의 견해차이로 실각, 반체제인사가 된 인물이다.
유고는 지난 한햇동안 2천6백65%의 인플레를 기록했다.
88년말 환율은 미화 1달러에 5천디나르였던 것이 89년 말에는 1달러에 10만디나르까지 올랐다. 이같은 환율은 날마다 끊임없이 오름세를 보이고 오후2시 유고 전국에 그날치 오른 변동환율을 고시, 모든 외환거래 장소에서 동시에 적용한다.
지난해 11월초 베오그라드공항 환전소에서 1백달러를 바꾸었을때 4백65만디나르를 내주었다. 다음날 슬로베니아공화국 수도 류블랴나의 홀리데이 인 호텔에서는 4백75만디나르를 바꿔주었다. 사흘 뒤 베오그라드의 모스크바 호텔에서는 1백달러가 4백%만디나르로 계산됐다.
그리고 불과 1개월반 후 달러대 디나르는 1대10만으로 갑자기 뛴 것이다.
유고 6개 공화국 가운데 하나인 서부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도심에 있는 남녀정장 의류가게는 여자점원이 한달에 두차례씩 정가표를 바꾸어 단다.
매일 오르는 가격에 맞추어 아침마다 정가표를 바꾸어 달수 없어 월2회 교체하지만 정가표를 바꿀 때는 그동안 오른 가격에 맞추어 대폭 오른 정가를 매긴다.
유고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안정돼 있는 슬로베니아의 경우 1년전 밀크 1ℓ가격이 8백73디나르였으나 89년말 5만3천디나르로 50배가 올랐으며 연어통조림 1개가 5천3백디나르에서 12만2천2백디나르로 또 배가 뛰었다.
이같은 물가폭등은 모든 물가에 똑같이 적용된다.
물가가 뛰면서 시민들의 수입도 함께 오른다. 봉급도 매달 기하급수적으로 오르기 때문에 뛰는 물가를 앞지르지는 못해도 허겁지겁 뒤좇아는 가고 있다는 것이다.
류블랴나에서 만난 지방 일간지 델로지의 외신부 기자 슬로보단 부야노비치씨(34)는『지난달 봉급이 50% 올랐는데 이번달 다시 50% 인상됐다. 3개월만 같은 속도로 봉급이 인상되면 봉급이 3배반 오르게 된다. 그래서 겨우 물가를 뒤쫓아 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야노비치 기자는 월급이 얼마냐는 질문에는 한동안 머뭇거리면서도 대답을 못했다.
『프라이버시라면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자 그는『그게 아니고 사실 내 봉급이 디나르로는 얼마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부야노비치 기자는 이어 『정확하게 말하면 8백60 서독 마르크』라고 말했다.
기자 경력 7년의 부야노비치씨의 월급은 한화로 따지면 약30만원 정도다.
그는 자신의 봉급이 서독 마르크를 기준으로 고정돼 있기 때문에 봉급을 디나르로 받아도 실질 소득에는 커다란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그래서 격심한 인플레에도 불구하고 생활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고 설명했다.
매달 50%씩 인상되는 봉급은 오른 환율만큼 서독 마르크를 기준해 디나르로 받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명목상의 디나르 경제는 사실상 마르크 경제인 셈이다.
각종 물가도 봉급인상과 같은 방식으로 오르고 있으며 봉급생활자는 매달 훨씬 두툼해진 디나르 지폐를 받아들고 흐믓한 마음으로 귀가해서는 그새 오른 물가에 다시 발목이 잡히는 좌절을 경험한다.
동서유럽 전체에서 이름있는 관광여행사인 슬로베니아의 콤파스사도 이 같은 봉급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회사의 홍보담당여직원 이레나 즈도브츠양은『인플레요? 걱정없어요』 라며 작은 몸매가 어울리게 명랑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가도 오르지만 봉급도 오르고 생활은 약간씩 위축되지만 별다른 위기는 없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콤파스사의 홍보담당과장 이라디미르 밀라디노비치씨는 이 같은 인플레와 인플레 극복 방법을「유고슬라비아의 신비」라고 말하며 『그 신비는 복잡해 보이지만「마르크」의 기능을 이해하게 되면 아주 간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밀라디노비치씨에 따르면 콤파스사는 또 다른 봉급 보전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콤파스사는 직원 4천6백명에 유고전역에 19개 호텔(객실 3천3백실)을 보유하고 연간 2백만명의 외국관광객을 유치하는 유고굴지의 관광회사다.
콤파스사는 직원 4천6백명을 위한 특별「사내 금융제도」를 설치, 직원들의 인플레로 인한 손실을 예방해주고 있다.
이 사내 특별금융은 이른바「회사은행」이다. 매달 지급받은 직원봉급을 디나르로 예탁 받은 뒤 즉각 서독 마르크나 미 달러로 바꾸어 보유한다. 직원이 필요한 금액을 디나르로 인출해갈 경우 이 사내금융은 환율이 오른 만큼의 덤을 가산해 인출요구액을 계산해 내준다.
즉 예탁 후 10일 후 1백만 디나르를 인출할 경우 10일간 오른 환율 15%를 가산해 1백15만디나르를 내주는 식이다.
슬로베니아에는 대기업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콤파스사와 같은 사내금융제도를 두고 있다.
그러나 사내금융제도는 많은 인력과 외환전문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소규모기업은 감히 설치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따라서 소규모기업이나 자영업자, 사내금융제도를 이용하지 못 하는 농부나 다른 서민들은 살인적인 인플레를 이기기 위해 봉급인상 투쟁을 벌이거나 판매상품의 가격을 계속 인상하는 수밖에 없다.
밀로반 질라스가 말하는「인간성의 파괴」는 따라서 사내금융제도를 이용하지 못하는 서민들에게 가장 먼저 해당되는 말이 된다.
유고슬라비아는 이 같은 격심한 인플레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같은 부동산투기는 거의 전무하다.
대부분의 토지나 건물·주택은 원칙적으로 국가, 또는 사회소유이기 때문에 개인이 땅이나 주택등 부동산을 사모으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허용되는 부동산 사유허가에도 불구하고 유고인들이 부동산투기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밀라디노비치씨는 이 같은 부동산가격 안정은 봉금이나 상품판매가격과 마찬가지로 실가가 서독 마르크를 기준으로 매겨져 있어 디나르화로는 매일 엄청나게 값이 오르지만 마르크화로는 가격이 불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즉 부동산을 사놓아도 실가는 변동이 없어 나중에라도 별다른 차액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밀 라디노비치씨는 그러나 『서독 마르크나 미 달러화등 외화를 만질 수 없는 사람이 집 한칸도 없을 경우 그것은 재앙이 된다』고 말했다.
나날이 천문학적으로 오르는 디나르화 인플레는 그 같은「무능한」사람에게는「자살의 길」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블라디미르 밀라디노비치씨와 류블랴나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자그마한 개천 같은 류블랴나강변 노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한참「유고경제의 신비」를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
초라하기는 하지만 말끔한 신사복 차림의 60대 남자 한 사람이 밀라디노비치씨 앞에 다가가 슬로베니아어로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밀라디노비치씨는 선뜻 20만디나르를 이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이 노인이 커피 한 잔 마실 돈을「빌려달라」고 했다』고 통역했다.
이른바 유고 거지인 이 노인은 『감사하다』고 두세번 몸을 굽신거린 후 다시 조용히 밀라디노비치씨에게 다가가 무어라고 말했다.
밀라디노비치씨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고 그 노인 신사거지는 사라졌다.
밀라디노비치씨는 『그 노인 거지가 너무나 감사해 나중에 돈을 돌려드릴테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밀라디노비치씨는『한달이나 두달 후 저 노인이 20만디나르를 돌려준다해도 그때는 20만디나르가 5만디나르 가치도 되지 않을 것인데 되돌려 받아 뭣하느냐』고 말했다.
그는 다시 『2∼3개월 후 저 노인거지를 다시 만나게될 경우 커피 값으로 1백만디나르를 주어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밀라디노비치씨는 『인플레로 고통받는 것은 서민이지만 고통받지 않는 사람은 콤파스사 직원 같은 사내금융 혜택자나 암달러상, 그리고 인플레율 만큼 더 많은 돈을 적선 받을 수 있는 저런 구걸인들 뿐』이라고 말하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지난해 11월 베오그라드의 번화가 차라피차가의 분수대는 유고인들과 외국관광객들이 던져 넣은 돈으로 수북했다.
소망을 비는 이 분수에는 동전도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 붉은 색깔의 1만∼10만디나르짜리 유고 지폐가 분수대 물위를 가득 덮어 둥둥 떠 있었다.
그러나 올해 1월1일이 후부터 이 분수대에서 지폐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유고정부가 90년1월1일을 기해 화폐개혁을 실시, 명목가치를 1만분의 1로 절하하면서 더 이상 지폐를 던질 수 없게 돼버린 탓이다.
그러나 아무리 명목 절하를 통해 1백만디나르를 1백디나르로 바꾸어 부른다고 해도 유고 경제가 쉽사리 회복될 것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명목을 바꾼다해도 연간 인플레 2천%를 넘는 유고 경제가 하루아침에 소생하기에는 구조적 문제가 더 무겁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이 나라의 고민이다.
글 김동수 부국장
진창욱 기 자
사진 주기중 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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